(19) 너 말고 니 언니.txt

메밀밭파수꾼 작성일 14.07.22 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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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가장 찌질하고 비겁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한다. 대학 신입생 시절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동아리 선배의 동생이었고 나는 곧바로 선배에게 접촉했다. 선배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넘기는 조건으로 학식 식권 열장을 요구했다. 세장 더 얹어서 열세장을 바쳤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한달 반을 쫓아다니며 공을 들여서 한달 반을 만났다. 그때쯤 그녀가 내 눈을 피하기 시작했다. 안녕 미안해. 나보다도 더 오래 사겼던 남자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첫연애가 끝이 났다.



 그녀를 잊으려고 소개팅을 했다. 그여자와 두번 더 만났다. 괜찮은 여자여서 그대로 잘해보려고 했는데 자꾸 그녀 생각이 났다. 술을 마시고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놈과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나쁜년. 그놈의 주먹은 매웠다. 나는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아프고 쪽팔려서 그자리에 주저앉아 좀 질질 짜는데 마침 귀가하던 선배에게 딱걸렸다. 선배는 혀를 끌끌차더니 내 뒷통수를 빡하고 내리쳤다. 아 아파요!!


일어나. 술이나 마시자.
선배가 사는 거에요?
어휴 이 븅 신새끼.        

 선배는 그당시 한창 유행이었던 오뎅바로 날 데려갔다. 바에 앉으려는 선배의 손목을 낚아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꼴에 깔끔 떨기는. 나는 어깨를 살짝 들어올리며 머쓱하게 웃었다. 선배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 놓고 내게 메뉴판을 쓱 밀었다. 우동사리도 추가해도 되죠? 




 학기초 기타동아리나 축구동아리에 들까하고 정문 앞에 늘어선 동아리 천막을 기웃거리던 때 선배를 처음 보았다. 선배는 토론동아리 천막의 테이블 가운데에 앉아 과자를 우적우적 씹으며 매서운 눈으로 지나가는 신입생들을 스캔하고 있었다. 사실 얼굴이 예뻐서 좀 쳐다봤는데 선배의 레이더망에 내가 딱 걸렸다. 선배가 씨익 미소 짓더니 한쪽 손을 들어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주위를 둘려보고 저요? 입모양으로 묻자 그녀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리 와보라고 손짓을 했다. 토론은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새 나는 선배 앞에 앉아 입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가 뭐랬어. 썅년이라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자기 동생을 어떻게..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절 소개시켜주지 말았어야죠. 
야 난 분명이 말했어. 그냥 썅년도 아니고 빙썅이라고. 빙그레썅년.
하아..
잔이나 받아.


 선배는 자기 동생이 진짜 나랑 사귈줄 몰랐댄다. 내가 그녀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데다가 그냥 늘 해오던대로 적당히 어장관리 좀 당하면 알아서 내가 지쳐서 나가떨어질줄 알았다고. 그러면서 세상엔 지들이 호구인지도 모르는 호구새끼들이 천지라며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호구가 호구인줄 알면 그건 호구가 아니죠. 선배는 불쌍한 눈빛으로 내 손에 오뎅꼬치를 하나 쥐어주었다. 

아 근데 왜 고추오뎅은 선배가 다 먹어요? 나도 그거 좋아하는데.        
짜식 예리한데. 마냥 호구는 아니군. 




 어쨌거나 선배는 나에게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것 같았다. 입이 걸고 손버릇은 거칠지만 의리는 있는 사람이라 알게 모르게 그후로 나를 챙겼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밥도 얻어먹고 술도 좀 많이 얻어먹었다. 의외로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살짝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백프로였다. 선배에게 은근슬쩍 그녀의 근황을 물었다. 답은 한결같이 잘먹고 잘산다였다. 
 그렇게 그럭저럭 꾸질꾸질하게 1학년을 보냈다. 2학기 종강모임이 3차만에 파하고 어쩌다보니 선배랑 둘이 남아 4차를 왔다.  

그거 알아요? 선배랑 걔랑 얼굴도 닮았고 웃는것도 닮았고 하품하는 표정까지 닮은거.
뭐래. 자매니까 닮은게 당연하지.
아 그런가.. 근데 하나 안닮은게 있는데.. 
뭐? 
어우.. 아니다 아니다. 됐어요 됐어.
  취했던 와중에도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이성이 급하게 입을 막았다. 그런데 눈까지는 제어가 안되었나보다. 나도 모르게 선배의 가슴께로 시선이 가서 바로 들켰다. 아니 이 새끼가 어딜 쳐다봐? 왼쪽 정강이를 걷어 차였다. 눈물이 찔끔 났다. 

아 아파요!!
니가 남자라서 잘 모르나본데, 걔 그거 다 뽕이야 뽕.
음..아닐걸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니가 봤어?
본건 아니고 만져.. 
뭐라고??!!!
아니 방금 제가 뭐라고 했죠?

 오른쪽 정강이까지 시원하게 까였다. 그리고는 아예 내 옆으로 와서 주먹질을 해댔다. 내가 생각해도 맞아도 싸서 가만히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술이 다 깼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선배의 양팔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안놔주었다. 헤헤. 내가 고개를 한쪽으로 꺾고 최대한 얄미운 표정을 짓자 선배가 벗어나려고 낑낑거렸다. 그모습이 꽤 귀여워서 살짝 웃음이 났다. 잠깐만! 귀엽다고? 선배가? 깜짝 놀라서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그렇게 벙쪄있다가 몇대 더 맞았다.       


 그날따라 선배가 많이 취했다. 아무래도 집에 보내야될것 같아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 새벽 공기가 닿자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선배는 옆에서 집에 가기 싫다며 계속 떼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택시를 잡으려고 하는데 선배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동안 그대로 눈을 맞추고 있었다. 순간 열이 확하고 올랐다. 손바닥에 땀이 베어 나와 축축해졌다. 술이 깨는건지 더 취기가 오르는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생각으로 선배를 내 자취방에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정신이 조금 드는것도 같았다. 선배도 물 줄까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너 되게 깨끗하게 하고 사는구나. 선배는 의미없는 혼잣말 몇마디를 하면서 어색하게 두리번거렸다. 나는 싱크대에 기대 서서 그런 선배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선배는 안쓰러울 정도로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조금 젖은 목소리로 그냥 집에 가야겠다고 했다.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선배는 그대로 나갔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녀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딱 그만큼 아쉽고 안타까웠고 아팠고 화가 났다. 대체 난 뭘 바랬던걸까. 이런 복잡한 마음으로는 잠이 들지 않을것 같아 캔맥주를 하나 따서 들이켰다. 아까보단 한결 괜찮아진것 같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왔다. 



똑똑똑.
 ... 
나야.


선배는 울었는지 눈이랑 코가 빨갰다. 


야 이 새끼야. 넌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했다.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내 목을 잡고 매달렸다. 잠시 입을 떼고 숨을 고르는 중 마주친 두 눈빛이 뜨겁게 얽혔다. 거칠게 섞인 숨 속에서 알싸한 알콜향이 났다. 나는 그 어느때보다 취해있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말짱했다. 자꾸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그녀를 깊이 안았다. 야 이 나쁜놈아, 개 자식아, 그녀가 눈물 섞인 욕지기를 토해낼때마다 입을 맞추며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심장이 완전히 닿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선배는 내 비겁함에 질려 잠수를 탔다. 내가 다음날 선배에게 미안해 라고 해버렸거든. 그리고 그때의 나로서는 그 상황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군대로 도망을 갔다. 이제와서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그리고 말도 안되게 찌질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깨달았을 때엔 이미 늦어버렸지.     

  아무튼 그랬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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