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악령 마지막

씨바둥 작성일 17.07.10 00:2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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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었어요. 군의
관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더군요. 내가 의식을
되찾았다고 말하자 군의관 주변으로 많은 장
교들이 몰려 왔어요. 연대장의 모습도 보였죠.
연대장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묻더군
요. 저는 일단 팔에 꽂혀 있는 링겔부터 빼 달
라고 부탁했죠. 영양제였는지 군의관이 지체
없이 빼 주더군요.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끔
찍했던 간밤의 상황을 들려 주었죠.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하더군요. 연대장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는 침통한 표정으로 일
어섰어요. 수고했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의무
실 밖으로 나갔어요. 장교들이 모두 나가고 나
자 군의관이 걸을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내
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체 확인 좀 해 달라는
거예요.
나는 일어나서 의무실 한쪽으로 갔어요. 하
얀 휘장을 걷자 나란히 누워 있는 네 개의 침
대가 보였어요. 군의관이 하나씩 천을 걷었어
요. 불에 타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시체는 소대장, 선임하사, 정 상병, 손 일병
순으로 누워 있었죠. 내가 모두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군의관이 서류를 내밀며 아래쪽에다
사인을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곤 이제는 여
기서 나가도 좋고 계속 있어도 좋으니 마음대
로 하라는 거였어요.
나는 한시라도 빨리 지난밤의 끔찍한 악몽
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의무실을 나섰어요. 문
득, 창고에 한번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군
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죠. 가까이 가 보니
창고는 완전히 전소돼서 사라지고 없었어요.
흔적만 남아서 연기를 피어올리고 있었죠.
창고가 있던 자리에 서서 우두커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문득, 지난밤의 거센 회오
리 바람이 떠올랐죠. 이어서 정말로 악령이 사
라진 걸까, 하는 의혹이 들었어요.
약초장수의 육신은 사라져 버렸지만 원한으
로 뭉친 기(氣) 덩어리는 남아 있으니 다른 사
람의 육신을 빌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거죠. 간밤의 악몽이 떠올라 몸서리
를 치고 있는데 연대장 당번병이 허겁지겁 달
려왔어요. 연대장이 급히 찾는다는 거였죠.
연대장실로 가 보니 고급 장교들이 모두 모
여 있더군요. 장교들끼리 회의를 하고 있었나
봐요. 연재장은 나에게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
더니 수고했다며 봉투 하나를 내미는 거였어
요. 그러면서 당장 휴가를 떠나라는 거였어요.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연대장의 명령이고 해
서 경례를 붙이고 나왔죠. 봉투 안을 들여다보
니 만 원짜리가 열 장 들어 있었어요. 십만 원
이면 군대에서 주는 특별 격려금 치고는 상당
한 액수죠.
저는 휴가 신고도 없이 부대를 곧바로 떠나
왔어요. 부대를 나오자마자 임성수 씨를 찾아
다녔어요. 정말로 악령이 영원히 사라진 건지
무척 궁금했거든요. 이틀 동안 여기저기 수소
문하고 다녔지만 임성수 씨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죠.
포기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면
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를 빨리 휴가 보낸
것은 뭔가 은폐하려는 속셈인 것 같았어요. 나
를 휴가 보내 놓고 재빨리 사건을 처리해 버리
겠다는 거겠죠.
장교 한 명에다 하사관 한 명, 사병 두 명이
죽은 정도의 사건이라면 보통 큰 사건이 아니
잖아요. 그런데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가는 삐리리 (금칙어네 ㅡㅡ)취급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해서 나의 방화나 살인으로 조작했다가는 사
회적 파장이 너무 크겠고 해서 실수로 인한 단
순 화재 사건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나 봐요.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 추측해 본 거예요.
그리고 참, 제가 휴가 신고하러 가려고 인사
과에 들렀더니 저는 2주 휴가가 아니라 3주 휴
가를 받은 거라 하더군요. 그러니까 1주일 전
부터 포상 휴가를 받아 휴가를 떠난 걸로 되어
있으니 2주 후에 원대 복귀하면 된다는 거예
요.
후훗! 참 우습죠? 서류까지 그렇게 꾸미고
나니, 악령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치
제가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 있죠. 얼
굴이 이토록 하룻밤 사이에 팍삭 늙어 버리도
록 끔찍한 경험을 했으면서도 말이에요.
누군가 그랬다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고.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누군가 저에
게 10년 후에 그 일에 대해서 물으면 제가 정
말 그런 경험을 했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지 의
심스러워요.
철규는 이야기를 모두 마치고는 길게 한숨
을 내쉬었다. 철규의 주름잡힌 얼굴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임성수 씨를 찾는데 실패하고 나서, 이 이
야기를 영원히 묻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어
요. 저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바꿔먹었죠. 악령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들었어요. 그래야지만 선량
한 사람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철규의 음성은 허공으로 힘차게 날아오르지
못하고 강물 위로 맥없이 떨어졌다. 그리곤 강
물과 함께 하류로 하류로 떠내려갔다.
“엄 장군에 대한 소식은 그 뒤로 못 들었
어?”
“못 들었어요. 아마도 잘 있겠죠. 권력과 부
와 장수를 누리면서.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들
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 악령이 존재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세상 참 불공형하군.”
“그래요. 저도 이 일을 겪고 나서 그런 생각
을 많이 했어요. 우리 시대에는 보다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야겠죠.저는 이번 일을 통해서
너무 혼란스러워 졌어요..
그 악령이라는 것, 사실 그 사람은 피해자잖
아요... 강한자에 의해,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긴...
그리고 가해자는 행복하게 자기 삶을 누리
고...
악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졌어요..
그 약초장수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잃고 방
황하는 악령이 된 것이 이해가 되요.. 나라도
그렇게 했을테니까요... 그리고 장교들이 사건
을 은폐하는 것을 보고, 어쩌면 그 악령과 대
면 했을때보다 더 무서움을 느꼈어요.
진실이란 것이 힘있는 자의 편의를 위해
얼마나 왜곡되고 잘못 전달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세상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요...”
철규는 죽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회한섞인
말로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그러더니 바지를 털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디 갈 생각이니?
특별히 갈곳도 없잖아... 집에도...”
나는 여기까지 말하고 말실수 한 것을 느
꼈다. 하지만 철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대꾸했다.
“집에도 한번 들릴 셈이예요..
그리고 이번에 받은 충격을 치유할겸 여행
도 하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철규가 결코 집에
가지 않으리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철규는 그냥 떠나려는 것이다.
“야 임마, 너 돈 없잖아...이거 가지가고 나
중에 값어라.”
나는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주었다. 많
은 돈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철규
에게는 꽤 쓸모있을 정도였다. 철규는 거절
하지 않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더니 그 돈을 받
았다.
“형 고마와요.. 꼭 돌려 들릴께요..
그리고 걱정마세요...
아 또 지영이에게 내 얘기 하지 마세요..그
냥 잘있다고 전해 주세요..
괜한 걱정하게 하기 싫어서요..
형, 지영이에게 잘 해줘요..
지영이 형 좋아하는 것 알죠?”
철규는 나를 놀래키는 말을 끝으로 나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 한번 나는 선배로서의 무
력감을 느꼈다.
아니다, 어쩌면 작은 인간으로서의 무력감
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강은 모든 것에 초연한듯 흘러가고 있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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