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 1

hyundc 작성일 18.11.14 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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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벌써 삼십여년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옆집 살던 그녀를 생각하면 뽀얀 피부가 단박에 떠오른다.

 

그리고 동그란 눈, 하얀 치아, 파하하하 박수를 치며 크게 웃는 모습.

 

말 없고 숫기 없어 내외 가리는 나와 달리, 그녀는 사근사근 타인에게 다가가는데 거침 없었다.

 

낯을 무척 가리는 사춘기 시절 내가 그녀와 거리낌 없이 친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그녀의 뛰어난 사교성을 보여주는 반증 이기도 하다.  

 

   


내 친구 녀석들은 그녀를 보러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야, 주희 좀 불러봐 바. 얼굴 이나 보자"

 

친구 녀석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항상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 집에 놀러 와서도 내 친구들이 있으면 의례 샐쭉 거리며 다시 되돌아 나간다.

 

그녀가 되돌아 나가면 "너 임마, 솔직히 고백 해봐. 너 밤마다 주희랑 짝짝꿍 노는거 아냐?" 라고 친구

 

녀석들은 짖꿏게 놀렸다.

 

 

 

 

 

 

 

2.


그녀와 꺼리낌 없이 동네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

 

그때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행여 들킬까,

 

보고 싶어 했던 마음을 혹여 누가 알아 차릴까,

 

사춘기의 소년이니까 말이다.

 

달빛같이 뽀얀 그녀의 피부를 볼때마다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장난을 칠때도, 시험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 몸에서 나는 은은한 라벤더 향을 맡게 될때마다.

 

그럴 나이였다.

 

테스토스테론과 아드레날린이 드넓은 강처럼 내 몸을 흐르던.

 

 

 

 

 

 

3.

 

 

 

언제 부터인가 그녀는 평소 이상으로 발랄하고 쾌활해졌다.

 

더 크게 웃었고 작은 일에 더 많이 감동했다.

 

아주 오래 옆집 동무로 살아온 나는 그 변화를 감지 할 수 있다.

 

혹은 동무 이상으로 관심이 많았던 탓이거나.

 

분명 조금 더 크게 웃었고, 조금 더 많이 감탄 했으며, 조금 더 많이 상냥하게 굴었다.

 

 

 

 

그녀가 남자의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걷는걸 보게 된건 순전히 우연 이었다.

 

나는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 가는 중이었고,

 

저 30M 앞으로 다정한 한 커플이 손을 잡고 걸어 가고 있었다.

 

별 생각없이 그저 잰 걸음으로 커플을 따라 잡으려다 나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익숙 하다는걸 깨달았다.

 

 


커플은 다정히 손을 잡고 걸어 가다,

 

남자는 다정히 허리에 손을 둘렀고,

 

중간 중간 주희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피가 꺼꾸로 회전하는 기분이 들었고, 마치 보지 말아야 할 무엇을 훔쳐 본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수치심까지.

 

문제는

 

주희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가는 그 남자가 우리 아파트 아래 아래층 사는,

 

주희와 나보다 세살 터울이 더 많은,

 

고등학교 시절 부터 복잡한 여자 관계로 온 동네 아줌마들 입방아를 찢게 만들었던,

 

바람둥이로 제법 이름을 날리며 운동 특기로 대학을 진학한 형 이었다는 것이다.

 

'아니 왜 하필이면?' 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러다,

 

동네 대부분 여자들이 그 형 앞에만 서면 당황하고, 얼굴이 빨개지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뒤에선 그 형이 바람둥이라고 욕하던 그녀들이,

 

막상 그 형이 나타나 한번 웃음만 지어도 얼굴이 빨개지고 어쩔줄 몰라했다.

 

 


하릴없이

 

그저 못 본것을 본 것 처럼 고개를 숙이고 샛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심장 어딘가 쿡쿡.

 

가시에 찔린것 처럼 아팠지만 그 통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던 나이였다.

 

집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거리를 그 커플에게 내어줘 버린체 나는 그 날 샛길 골목을 돌고 돌아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찬란했던 내 사춘기 시절 작은 모퉁이,  한 계절이 돌았다.

 

 

 

 

 

 

4.

 

 

 

언제 부터인가 그녀가 평소 이상으로 어두워졌다.

 

눈 밑 짙게 다크써클이 배어 있었고, 환하게 웃던 웃음은 땅 끝 저 어딘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주 오래 옆집 동무로 살아온 나는 그 변화를 감지 할 수 있다.

 

혹은 동무 이상으로 관심이 많았던 탓이거나.

 

 

 

 


우리는 고3 이었기에,

 

대한민국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 그 누구도 밝을순 없겠지만,

 

내가 아는 주희만은 그래도 밝았어야 할 아이였다.

 

 

 
대학 입시를 앞둬 이젠 어쩌다 간혹 마주치는 사이이지만,

 

복도에서 마주 쳤을때 처음 주희가 아닌줄 알았다.

 

그녀 얼굴에 항상 내려 앉아 있던 환한 달빛이 사라졌다.

 

 

 

 


5.

 

그 즈음 언저리인가?

 

나는 밤마다 아파트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복도 저 끝에서,

 

'탁~ 스윽, 탁~ 스윽' 하는 소리가,

 

처음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누군가, 어느 집에서 물건을 끄는 소리인가?

 

하지만 어두워 지면 복도 저 멀리 끝에서 어김 없이 그 소리가 났다.

 

 

 

탁~ 스윽, 탁~ 스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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