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년 지나도 남을 기억 없애기..

새로운오후 작성일 16.06.23 14: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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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사는 게 바빠서 만날 수 없던 친구들도 사십이 넘어서니 하나 둘 만나 진다.

고교시절 학외 서클이라 할 수 있는 부천 YMCA에서 함께한 친구 P가 찾아왔다.

이틀 전 전화벨이 울렸을 때 이름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히며 약간은 히스테리 하게 전화를 받았었지.

 

"오~! 오랬만이네. 혹시 딸이라도 시집가는 거냐 어쩐 일?"

"하하 딸은 고2인데 뭘 벌써 시집을 가~!"

 

잊고 지내던 연락이 오면 경조사일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 목소리를 들으니 최소한 애사는 아니겠지 하며 무슨 일인가 이야기를 나눴다.

제조업에서 부장까지 근무하다 최근에 회사를 관뒀다고 했다.

1인 창업을 했는데 입소문이 필요한 일을 시작하려니 옛 친구들이 먼저 생각이 났다고 했다.

겉으로 반가운 척 하지만 속까지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십 년 전 마지막 모습에서 큰 실망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난 이유다.

  

 

고교 Y 시절 우리는 방학마다 축제를 개최했었다.

연극부, 민속부, 레크리에이션부, 문학부 총 4부는 각자 맡은 대로 노래, 연극, 사물놀이 등을 했는데 축제가 끝나면 다 같이 수련회로 더욱 단단한 우정을 쌓았었지.

그때는 그냥 그게 좋아서 뭉쳐 다닌 듯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꽤 큰 파벌 이였던 듯하다.

공부를 하는 스터디 모임이거나 일진회 같은 폭력서클과는 매우 달랐지만 그때의 다양한 활동들은 큰 추억으로 남아서 아직까지 그 끈끈함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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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친구들 중 제일 착했던 친구 K가 십 년 전 첫 번째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은 불의의 사고였는데, 유리공사를 직업으로 하던 그 친구는 쉬던 식목일 낮술에 취해 현장 컨테이너에서 잠이 들었다는데

전기난로에서 옮겨 붙는 화재가 참사의 원인 이였다.   

 

우리는 사회에서 막 자리 잡을 때라 직장에 매여 있었음에도 속속 대전으로 집결하였다.

장례식장 사정으로 길고도 긴 4일 장을 치르고 있었다.

 

3일 차에 나타난 P 부부는 조문을 하고 저녁을 먹은 잠시 앉아 있다가 늦은 밤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주일인 내일 교회를 가야 해서 올라간다는 것다.

지가 언제부터 교회를 다녔는지 몰라도 친구가 내일 발인인데 단지 그 이유로 간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가고 난 뒤 난 어떤 친구는 "예수가 교회에만 있나?"고 푸념했다.

그러고 10년 만에 첫 통화를 하는 내 입이 냉담할 수밖에..

 

계속된 통화에서 "너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니까 술 담배 안 하니 언제 한잔 할 수도 없겠다?" 라며 한번 더 찔렀다.

직장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스트레스로 술은 먹는다고 한다.

 

이틀 뒤 띵띵한 배 나온 몸으로 과일 음료수 한 박스 들고 웃음 한가득으로 사무실에 나타났다.

오래된 사이라 서로 똥오줌 못 가리던 시절부터 잘 아는데..

이 친구도 부모한테 받은 거 없이 이십 대 중반에 애 낳고 열심히 살아왔을 거다.

LED조명 제조회사에서 하루 열네 시간을 근무를  했단다.

저녁은커녕 늦밤도 없는 삶을 길게 버티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판단했단다.  

 

새로 시작한 일은 청소대행업.

스타벅스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 주방을 밤새 청소한다고 했다.

아직은 배우는 중이며 오늘도 전날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기름 쩌른 주방 배관까지 치우고 왔단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매우 고된 일 일 텐데 의외로 P는 얼굴이 매우 밝다.

작은 회사 부장 직급은 급여에 비해 맡은 책임이 많았다고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데

청소일은 할수록 줄어드는 게 보여서 좋단다.  

 

놀라운 것은 친구의 와이프였다.

처녀 때부터 봤지만 애를 낳고 살면서도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마음씨도 여린 여성인데 함께 궂은일을 한다고 했다.

그것도 낮에는 본인이 사는 아파트 청소일을 본단다.

친구는 털털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처음에는 다섯 시간씩 했는데 이젠 요령을 터득해서 두 시간에 끝내, 너를 만난다니까 보고 싶다며 함께 오려고 했는데 청소시간이 애매해서 나 혼자 왔어"

 

 

2학년 된 고등학생 딸이 조금씩 술 먹고 다니는 거 같다는 이야기,

아들이 초등학교에서 수학을 곧잘 한다는 자랑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어딘가에 깊은 곳에 박혀있던 그때 서운함은 사무실에 돌고 있던 선풍기 바람에 날려간 기분이 들었다.

 

오늘 거래처에 택배를 부치고 오면서 모처럼 라디오를 틀었는데 마침 공일오비에 '이젠 안녕'이 흘러나온다.

나름 이뻤을 스물 시절, 많이도 불렀을 그 노래가 귀에 착착 감긴다.  

눈치 볼게 뭐 있나? 내 차인데..

따라서 꽥꽥 노래를 부른다.

20년도 넘은 노래를 그동안 연습 한번 없어도 가사가 가까운 어딘가에 숨어 있었는지 잘도 끌려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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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오 죽은 날 그 잊을 수 없는 기억 파일에 너에 대한 감정도 클립으로 단단히 끼워져 있었나 보다.

안 봤으면 오십 년이 지나도 어느 깊숙한 캐비닛에 남았을 건데 그러다 가끔 생각나면 덧붙인 그 서류도 함께 만났겠지.

 

쓸데없이 보관 말고 파쇄기에 넣으려면 만나야 한다는 것을 새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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