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너머 어딘가 #10. 낙서

백두사이다 작성일 18.02.03 11: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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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낙서

 

만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사랑을 나눴다.

모텔이란 곳은 의례 그래야한다는 듯이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격정적 시간이 흐르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벌써 옷을 챙겨입었다.

뭐해?

-가려고.

간다고?

-응.

왜?

-볼일 다 봤으니까.

볼일이라니?

-우리 이러려고 만나는거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난 너가 정말 더 이상해. 연락할 때 냉랭하고 연락 안하면 안한다고 툴툴대고.

그게 나도

-너 때문에 나까지 혼란스럽잖아. 그냥 쿨하게 만나자니까 왜 사람 혼란스럽게 그래.

내가?

-그래, 너. 

나도 지금 이런 상황이 헷갈린다고.

-그럼 그만하자.

그만할게 뭐있어,시작한 것도 없잖아?

- 그래. 네 마음 이제 알았으니까 전화번호 지워.

전화번호?

- 그래, 내 눈앞에서 번호 지워. 문자도 지워. 다신 엮이지 않게

좋아. 너도 다신 연락하지마.

 

꽝.

문이 닫혔다.

내 마음도 닫혔다.

침대 위로 던져진 핸드폰이 징징대며 반짝반짝거린다.

순간 전화를 받을까하다 외면했다. 

한 번, 두 번 흥이 넘치게 흔들리던 전화기가 조용하다. 

샤워를 하고 나와 전화기를 봤다.

그녀다. 

문자도 와있다.

- 지난 몇 달간 너를 만나면서 나 고민 많이했어. 

처음엔 가볍게 만나는게쿨하다고 생각했고 가능할 것 같았어.

남친도 좋은 사람이라 놓치기 싫었고 너도 너 대로 좋았어.

근데 언젠가부터 그게 안되더라. 

근데 도리어 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차가워지더라.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오늘 너와 처음으로 같이 자고 가고 싶었는데

모르겠다. 

내가 이러는 게 맞는지 아닌지.

나 집에 갈거야, 근데 지금 가면 다시 안만날거야.

이건 확실해. 

그럼 안녕. 

 

문자를 다 읽고 나니 끊었던 담배가 간절해졌다.

인스턴트 사랑을 하자고 양다리를 걸치면서 마음 졸이게 연락시킨 그녀가

이제와서 순정녀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난 다시 예전의 여친들에게 늘 들었던 이기적인 남자가 되어 있었다.

뭐지? 

왜지?

짜증만 났다.

왜! 왜! 왜!

전화가 다시 울렸다.

내 손에 들린 상태로 그녀의 번호가 떴다.

번호를 지웠어도 외워지는 그녀의 뒷번호.

1초, 2초, 10초, 15초.

전화가 끊어졌다.

손이 떨리지만 다시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전화 받을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나이트에서 만난

그리고 양다리를 걸친 그녀.

내 여자친구로 인정할 수 있을까?

여자친구가 되어서 똑같은 상황이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더럽고 추악한 모습으로 그녀를 재단하고 있는 날 보았다.

그 상황에서 누리고 즐기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벽 4시다. 

다시 샤워를 하고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만남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였고 내가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문자는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왔지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용기였다.

비겁한 용기. 

 

"오늘 수업 끝내고 바람 한 번 쐬러갈까?

강선생이 손으로 술 넘기는 포즈를 취하며 물었다.

"가요, 심심한데."

"여친 안만나요?"

"헤어졌어요."

"아니 왜?"

"모르겠어요, 저도 마음이 좀 뜬 것도 있고 얘도 자꾸 투정부리고, 아이 몰라요."

"그래, 그래. 그럴 땐 쿨하게 놀고 풀어야해. 가자, 가."

강선생은 이런 일은 늘 있다는 듯이 주선생의 어깨를 토닥이며 학원을 나섰다.

학원가를 지나자 마자 화려한 네온싸인이 허공 위로 흩뿌려져 있다.

그 아래로 술 취한 아버님들, 깔끔한 양복차림의 삼촌들, 한껏 멋부린 여자들이 

흥을 겨누지 못한 채 곳곳의 술집으로 사라져갔다. 

나이트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여자가 들어왔다 나가고 들어왔다 나가고를 반복했다.

그렇게 부딪히는 술잔은 늘어갔고 웃음은 헤퍼졌으며 생각은 하나로 집결됐다.

섹스. 

화장실에 가자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다 못해 들어오라고 안달난 나를 발견했다. 

거울 속에서 눈치를 보던 그 녀석이 술 한잔 한잔에 비집어 나올 때 알았어야 했다.

그 동안 그걸 애써 외면했다는 것을.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이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윤리의 끈을 풀려는 순간,

강선생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여자의 신경질에 정적에 휩싸였다. 

"야이씨, 나만 쓰레기야? 다 이렇게 놀러 온거 아냐? 어?"

여자들은 재수없다며 방을 나섰고 강선생은 고개를 떨꾼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에이 씨, 다 알고 왔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강선생을 택시 태워 보내고 주선생과 나이트 앞에 남자들만 우루루 몰려있는 국수집에 자리를 잡았다.

- 다시 잘 연락해봐.

- 그게 좀 그래요. 걔가 나이가 있다보니 결혼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 주선생은 결혼 생각 없어?

- 있긴 하지만 놀 거 다 놀고 깔끔하게 결혼하고 싶은거죠?

- 깔끔하게?

- 늦바람 안나게요. 결혼해서 이렇게 놀면 안되잖아요.

- 일말의 양심인가?

- 팩폭이 심하네요.

- 모르겠어요, 요즘은 권태기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내 마음이 변했나 싶기도 하고.

- 모르는게 답이지, 뭐. 알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어? 

- 우선 시간을 갖자고 했는데 그게 잘한 건지 모르겠네요.

- 생각 많이 해봐. 어떤게 서로에게 가장 좋은 선택일지. 가자. 

- 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그녀는 뭐하고 있을까?

나는 어떤 사람일까?

백지 도화지에 나는 무엇을 그렸기에 이렇게 살고 있을까?

창밖 너머 벽 위에 그려진 낙서가 내 마음을 어지럽힌다. 

저 사람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저너머 어딘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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