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81

갑과을 작성일 19.02.17 23: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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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주설은......

 

봤어? 봤냐고! 스테반 로스차일드야 스테반 로스차일드! ...... 와후! 오매...... 천지신명이여...... 조상님이여...... 보이셔유? 지가 스테반 로스차일드 헌티서 명함을 받았어유!”

 

흥분과 전율로 인해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쾌재를 불렀지만, 나는...... 미안하게도 그녀의 성취에 동참할 수가 없었다. 마카롱을 한 주먹 가득 집어 입안에 우겨넣었지만, 입맛은 씁쓸했다.

 

명함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이걸 흥분 안허게 생겼냐? 너 임마..... 사업 쪽으론 완전히 깡통이네? 사업하는 아덜헌티 있어서 스테반 로스차일드가 명함을 줬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지 알어?”

“.....”

 

주설은 완전히 폭주해서 이리저리 지껄이는 걸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하아...... 당분간은 녀석과 의사소통을 하는걸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 인정한다. 대륙 최고의 부자에게 약속을 신청 받고, 그 증거로 명함을 받았다. 앞의 것을 차치해 두고서라도 명함을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업적으로 성공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녀가 저 정도 선에서 흥분을 조율 하는 것조차도 대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스테반 로스차일드라는 인물은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부채를 떠올리게 만드는 차용증 같은 존재란 것이 문제라는 거다.

 

작년 3월 나는 의뢰 하나를 받았다. 이스트 민스터 교구의 고아원으로 누구도 읽어선 안 되는 금서가 흘러들어갔으니, 그걸 되찾아 와 달라는 의뢰 말이다. ...... 정말 더럽게 생생하구만, 그때 토라는 내게 대륙 최고의 거물과 본격적으로 의뢰를 트게 되었으니 축하한다고 이야기 했었지만...... 그게 시간이지나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래..... 그때 나는 금서를 되찾아왔다. 멍청하게 그걸 읽는 짓도 하지 않고, 그걸 있는 그대로 의뢰주에게 돌려주었지. 물론...... 되찾아오는 동안, 불행하게도 그걸 읽어버린 사람이 있다는 걸 확인해서...... 제거했었다. ...... 솔직하게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제거하는 모습을 들켜버리는 바람에 목격자까지 제거했었지 그래...... 그 뒤에 나는 의뢰주에게 물건을 돌려주었다. ..... 물건을 받은 이가 스테반 로스차일드였다.

 

그래, 이제 와서 뭘 더 변명하고 피하겠는가. 답답이...... 그러니까, 아이리스..... 녀석의 양어머니인 토리스토아 테펠리나의 죽음은 나와...... 이 인간이 관련되어 있다는 거라고.

 

기왕 한 변명이니 하나 더 해야겠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스테반 로스차일드도 토리스토아 테펠리나를 특정해서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문제가 있다면, 그 여자가 그 책을 읽어버렸다는 게 문제다. ..... 정말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궁색해지는구만.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아니,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그냥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다.

 

이래서 나는 잠입 의뢰가 싫었다. 정말 더럽게 하기 싫었다고. 그냥 깔끔하게 아무런 인간적인 관계를 가지지 않고, 난입해서, 자르고 베고, 죽이면 얼마나 깔끔하냔 말이다....... 인간적인 관계는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물론 그게 직접적으로 무디게 만드는건 아니고....... 죄책감, 미안함, 그런 감정을 만든다. 그런 것이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것이다.

 

답답이의 어미가 까마귀의 풀로 복생한 것은...... 내 가슴팍의 비정한 마음이 폭주한 것을 막아주었지만...... 그것은 그냥 나에게만 해당되는 구원일 뿐, 답답이는 구원받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꼬라지를 봐라. 그녀의 인생은...... 파멸했다. 이스트민스터 교구 소속의 다정한 이웃은 사라지고, ‘그들과 엮여버린 현상범이라는 도플갱어가 그녀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 그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저 늙은이의 삶은?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대륙 최고의 거물이라는 자리는 그대로고.

 

그래...... 저 늙은이에 대해 비난을 한다고 해서 내 행동이 없어지는건 아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지 우리 둘은...... 나는 그녀의 어미의 원수다. 그 어미가 복생을 하든, 여전히 관짝 뚜껑 뒤집어쓰고 땅강아지가 그녀의 살을 파먹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 둘은 다시 만났고, 어쩌다보니 이런 모순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답답이는 나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나에 대해 완벽히 알게 되면이라는 단서조항을 붙이긴 했지만..... 확실한건, 나는 인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그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고, 그녀 자신에게는 매우 힘겨운 선택이었다는 것 하나는 잘 안다.

 

유보된 채로 이런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뜻하지 않게 영수증이 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리겔! 일루 와봐! 쩌 가시내들은...... 절루 치우고!”

 

주설은 내 머릿속의 전쟁터가 어찌되든지는 알바가 아니었고, 잔뜩 흥분해서 리겔에게 달려들어, 그의 품에 안겨있던 여자들을 떼어냈다. 그녀는 그에게 명함을 보여주었고, 의미를 설명하는 걸 잊지 않았다. 내게선 얻을 수 없었던, 그러나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반응을...... 저 프로하기온 뜨내기는 넘치도록 보여주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밀푀유를 한주먹 집어먹어 보았지만, 급하게 보충된 당분으로는 내 머릿속의 전쟁터를 종전은커녕 휴전 시킬 수조차 없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그런거여? 왐마 씨벌, 이라고 있을 게 아니구마잉, 재수없는 가시내 어디갔냐? 보나마나 어디가서 댐배나 쭐쭐 피고있겄지? 어이 주사장 쫌만 기다려 보씨요. 내 얼른 가서 그년 머리채라도 잡아가지고 올게잉.”

 

잔뜩 흥분한 리겔 놈의 뺨을 올려붙이면서 닥치고 가만히 좀 있어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 오랜만에 이 더러운 기분을 느끼는구만, 요즘 들어 작동을 안하길래 이젠 이 비정한 마음도 완전히 망가졌나 했었는데...... 왜 이런 타이밍에는 귀신같이 작동을 하나 모르겠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간만에 작동해서인지 그 어느때보다 진한 농도의 해시시가 내 핏줄속을 쏟아지듯 흐르며 온몸을 훑어내려 갔다. 하늘이 빙빙 돌고...... 내 머릿속에는 물먹은 스펀지가 골통을 가득 메워버렸다. 머리가..... 지독하게 어지럽구먼.

 

 

 

 

 

 

 

Channel 2. 아이리스

 

저는 지독하게...... 겁쟁이에요.

 

..... 언니! 잠깐만요!”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제 등 뒤에 끈적하게 달라붙었지만, 저는 뒤돌아서서 온몸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그저, 궐련 개비를 집어던지고 이 자리를 황급히 떠나는 것 뿐이었어요.

 

“......스는 잘 지내는거 맞죠? 언니는 알죠? .....!!”

 

문을 쾅 닫고, 저는 더 이상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내달렸어요. 다행이도 파티장은 컸기에, 정신줄 놓고 내달리다 보니, 어느덧 더 이상 저 저주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곳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어요. 목이 콱 막히고, 눈 가장자리는 뜨끈해졌습니다. 정말 이곳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랬다면 저는 꺼이꺼이 울면서 저 저주받을 년을 마음껏 욕했을 텐데 말이에요.

 

뭣허냐?”

“.......?”

 

꾹꾹 눌러도 제 가슴속을 빠르게 메워가는 비애감이, 위태위태하게 흘러넘치려는 순간, 리겔이 와서 제 어께를 잡아챘습니다. 하하...... 현자라도 한 번은 실수를 하고, 백치도 한 번은 잘하는 짓을 한다더니...... 제가 리겔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덕분에 눈물이 아주 쏙 들어가지 뭐에요? 저는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그의 눈을 째려보는 것으로 되갚아 주었답니다.

 

아따 요년은,..... 나를 봤다 하믄, 존나게 쏘아보는구마잉. 두고 봐 내가 언젠가 아주 가만히 안놔둔다잉.”

여긴 무슨 일이야?”

뭐긴 뭐여. 주사장이 찾어 마. 지금 주사장이 한 건 해냈어야.”

한 건?”

, 주사장이 스테반 로스차일드허구 약속을 잡아브렀어.”

스테반...... 로스차일드? 내가 아는 그 사람 맞아?”

아따, 그라믄 이 대륙서 스테반 로스차일드가 둘 이겄냐?”

그럴리는 없지...... 그럴리는...... 그럼 언제 본대?”

조만간에 일 마치구 바로 우덜헌티 온다구 한다드만, 근디말여.”

 

이 대목에서 그의 눈은 악의적으로 빛이 났어요.

 

니는 보기 쪼깐 어려울 성 싶다?”

내가? ?”

니 짝지가 갑자기 거품 물어블고 쓰러져브렀어.”

내 짝지......? 로키군?”

, 갸가 아까츰에 뭐를 존나게 집어묵드만 고것이 잘못되얐는지 거품 물고 드러누워버리던디?”

 

그의 말을 듣고, 후다닥 달려갔습니다. 이 넓은 파티장에서 쓰러진 로키군을 어떻게 찾나 싶었지만, 그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저쪽에 사람들이 모여서 걱정스러운 듯이 두런거리고 있었거든요. 역시나 그쪽엔 로키군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있었습니다. 아이고 참..... 난감한 노릇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기사를 행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알잖아요...... 기적을 통한 의료행위는 금지되어있는걸요. 안 그래도 수배범인 이 상황에서 기사까지 행한다면...... 그래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저는 웨이터를 불러, 그를 안정시켜야겠으니 조용한 방을 섭외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웨이터분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는지 당황해서 허둥지둥했어요. 사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왔습니다.

 

아이고, 늦지 않게 와서 다행입니다. 저희가 만나기로 했었지요? 응접실은 조용하니, 그곳에 따로 쉴 곳을 마련해두겠습니다. 저희 쪽이 먼저 가서 응접실에 칸막이를 설치할 테니, 따라오시죠.”

 

스테반 로스차일드씨는 웨이터에게 손짓을 했고, 그들은 후다닥 응접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리겔은 로키군을 업고, 웨이터를 따라 응접실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어요.

 

 

 

 

 

 

 

Channel 1. 로키

 

온몸이, 특히 머리가 물먹은 스펀지 마냥 눅진해 있었고, 나는 그 몽롱한 기운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대로 가라앉는가 싶은 순간에, 리겔이 나를 들쳐매고 응접실로 데리고 갔다.

 

참말로 징하네잉...... 아야, 어울리지도 않게 뭘 그라고 집어 먹어싸서 이 사단을 맹그냐.”

 

녀석은 투덜거리면서 나를 소파에 던지듯이 내려놓았지만, 그 막나가는 처사에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든 감각이 느리게 흘러가, 소파의 쿠션에 몸이 튕겨지는 감각이 느리게 다가왔다. .....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이렇게 하면 좋겠군, 소파에 몇 번 튕겨지는 감각이 어찌나 느리게 내게 다가오던지, 몸이 몇 차례 출렁거리다가 잔잔해질 시점에, 그 출렁거리는 감각이 내 몸을 뒤흔들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시각이 지각하는 속도와, 촉각이 지각하는 속도에 격차가 발생하는 셈이지. 어쨌거나, 이 감각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순간까지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칸막이 다 쳐놨습니다.”

아따 일처리가 깔끔허요. 우리 아그가 요땀시로 민폐 캐릭터는 아닌디...... 오늘따라 애가 처묵는데 텐션을 올려버려가지고...... 지가 대신해서 사과허요.”

하하, 아닙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 뭐. 그럼 이만 쉬십시오.”

아녀라, 여그는 쩌 가시내가 맡을 것일께로, 나는 그..... 거시기로 델다주쇼.”

아 예 예. 알겠습니다.”

 

리겔은 답답이에게 나를 맡겨두고, 웨이터를 따라 칸막이 너머로 나가버렸다. ...... 입은 험하지만, 눈치는 제법 있는 편이란 걸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주설이 사람 보는 눈썰미는 확실히 좋은 셈이지.

 

로키군...... 괜찮아요?”

아니...... 전혀.”

요사이 이런 일이 없어서, 이젠 완전히 망가진 게 아닐까 싶었는데...... 타이밍이 영 좋지 않은데요?”

그러게...... 뜻하지 않게 소동을 일으킨 것 같다...... 면목이 없구먼.”

아니에요. 그래도 리겔이 눈치 있게 사람들을 데리고 갔으니까, 민폐까진 아니에요.”

 

답답이는 주변을 살피면서 내 손을 잡고 기도문을 읊었다. 나는 감각의 엇나감에 더 이상 혼란을 느끼지 않기위해 눈을 감았다. 그녀의 기도문은 그녀가 믿는 종교의 지도자격인 인물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 함께해온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면서 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 토막중 하나를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비유하자면 포도나무고, 나의 아버님은 그 농부다. 생각해봐라 포도나무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님께서 잘라버리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는게 자연스럽지 않겠느냐. 너희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너희를 가르침으로써 이미 깨끗해졌으니, 너희가 나의 가르침과 함께 살면, 나 역시 너희와 함께 살아 갈 거다. 가지가 아무리 잘났어도 포도나무에 달려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듯이, 너희가 나의 가르침과 함께 살지 못하면 너희도 그런 꼴을 겪게 될거다.”

 

몇 번 그녀의 기도문을 들으며 몸을 치료하다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녀석이 읊는 기도문을 귀기울여 듣게 되었다. 치료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선교까지 병행하려는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녀석이 믿는 종교가 어느 정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이야기보따리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어때요? 괜찮아졌어요?”

...... 많이 나아졌다.”

 

눈을 뜨고 시험삼아 손부채를 얼굴에 부쳐보았다. 손이 흔들리는 모습과, 얼굴에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거의 동시에 느껴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듯 하다.

 

이제 가 볼까요?”

......”

 

치료를 끝낸 답답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답답이는 내 돌발행동에 눈이 똥그래져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요?”

...... 아직 완벽하진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뭐에요 그게. 로키군 이런 스타일 아니잖아요. 다 나은게 뻔히 보이는데도 이런 식으로 꾀병부리는 건 처음 보는데요?”

꾀병이 아니라......”

 

...... 이거 참 일이 복잡하게 됐구먼, 이대로 나가게 되면 답답이와 스테반 로스차일드가 한 자리에 서는...... 나로선 매우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그 둘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겠지만...... 둘의 연결고리인 나는 그 둘이 한 자리에 마주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 둘은...... 내 과거의 악업을 떠올리게 만드니까...... 생각해야 한다. 그 자리를 피하는 데에 대한, 답답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이다.

 

그럼 얼른 일어납시다. 일해야죠.”

지금 이미 대화가 시작되지 않았을까? 사업상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도중에 끼어들었다가 어그러지는 것 보단, 여기서 대기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것 같다. 어차피 결과야 주설한테 들으면 되지.”

......”

 

내 말에 답답이는 골똘이 생각에 잠겼다.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쥐어짜낸 명분이 그녀에게 제법 그럴 듯 하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 다행이다. 그 반작용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해졌지만, 그 뿌리는 안도감에서 나온 것이라, 이만하면 기분 좋은 피로함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래요 그럼..... 어차피 칸막이 너머로 소리가 들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찬찬이 들어보고, 그래도 모르는게 있으면 나중에 물어보죠 뭐.”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의 말이 그럴 듯 해서 그쪽으로 갔다기 보단...... 저런 이유를 들먹이면서 까지 저를 저 안으로 들어가는걸 막으려는 그의 행동 때문에 저는 로키군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면서 기를쓰고 저렇게 막는걸 보면...... 뭔가 그럴 법 한 이유가 있었겠죠 뭐.

 

저는 로키군과 함께 소파에 앉아 가림막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들은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지만, 응접실이 워낙 조용했던 탓에,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았습니다. 일단 그들은 사교계에서 하는 형식적인 의례는 꼬박꼬박 챙겨가면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이게...... 상류층의 삶이겠죠.

 

듣자하니 사업을 하신다고요?”

. 그렇쥬...... 아니, 그렇습니다. 그려두 뭐...... 으르신께서 운영허는 것에 비하믄..... 애들 소꿉장난 정도죠 뭐.”

 

반사적으로 나오는 라스알하게 억양을 꾹꾹 눌러가며 고치는 주설씨의 목소리를 듣다보니, 웃음이 나오려 했습니다. 어지간히 긴장했나봐요. 이제껏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고 드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또한...... 스테반 로스차일드씨도 블라우 브룩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터라, 그녀가 어디 출신인지는 뻔히 다 알고 있었을 터라 그녀가 굳이 억양을 고칠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주설씨도 그걸 몰랐을 리는 없었을 테지만...... 대륙 최고의 거물을 독대한다는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긴장감에 압도된 소녀로 만들어버린 모양입니다.

 

규모가 크든 작든,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 주머니로 옮기는 게 쉽지 않은 건 매한가지 아니겠습니까? 어려운 일 하는건 똑같은데, 기죽을 필요 없어요.”

..... 감사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네유.”

 

이후에 가림막 너머로 챙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건배라도 하는 모양이에요. 이후 입맛 다시는 소리가 몇 차례 들린 뒤에, 스테반 로스차일드씨는 주설씨에게 덕담을 몇 마디 더 이어갔습니다.

 

돈이란 건 손아귀 속 모래와 같더군요. 어쩌면 저는 로스차일드라는 가문의 마지막 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주설씨는 주씨 가문의 부유함을 만드는 첫 세대가 될 수도 있지요.”

아이구...... 대륙 최고의 부자에게 이런 말씸을 들으니 참으로 민망허네유.”

젊음은 좋고, 도전도 좋죠. 도전하는 젊음은 더 좋고요. 믿기지 않겠지만 저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칸막이 너머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이렇게 벽 너머에서도 그의 부드러운 유머가 느껴지는데, 눈앞에서 그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었습니다. 스테반 로스차일드씨는...... 주설씨를 대하는 태도며, 은은하게 하는 유머며...... 확실히 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런데, 주설씨는 블라우 브룩에서 계속 사업을 이어갈 참입니까?”

..... 실은, 요번 참에 일 터지구 나서...... 여러모로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요?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블라우 브룩에서의 도자기 판매 사업은 그대로 해볼 참이구...... 운터 브룩 쪽에 백화점을 한 번......”

아 그런데 잠깐만요...... 도자기 사업 말입니다. 들으셔서 알겠지만, 라스알하게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는데, 안정적으로 물품을......”

확보할 수 있쥬. 지랑 계약한 공방이 프로하기온과 라스알하게 중간지역에 있어서, 굳이 열차 안 끼구 곧 바로다가 프로하기온에 배송할 수가 있거든요.”

허허, 그렇군요. 안정적인 공급망이 확보된다면야 분명 성공할 아이템이니 괜찮을 것 같군요. 그럼 백화점은......”

, 여그 운터 브룩, 미테러 브룩, 어퍼 브룩을 아우르는 디어즈 힐 구는 아무래두 상대적으로 낙후된 곳이다 보니 다른 구에는 하나씩 있는 백화점 하나 없더라구요? 아시겄지만 디어즈 힐은 여그 클라허 타히가 있는 쉬덴플루 다음으로 인구가 질로 많은 곳 아니겄습니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구, 암만 낙후되두 사람 수가 많으니 백화점을 맹글면 분명 지탱할 수요가 있을 거라구 생각해요.”

그래도 단순히 사업적인 안목에서 디어즈 힐을 선택한 건 아닌거 같은데요?”

...... 아무래두 운터브룩에 지 동포덜이 많이 살어서요. 이래저래 괄시받는 처지지만, 구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를, 그것도 동포가 만들었다고 하믄...... 분명히 자부심이 되지 않겄나 합니다.”

동포들을 위해 두 팔 걷어부치신다?”

그렇게 봐주시면...... 지야 감사하죠. 물론, 말씀허신대루 라스알하게계 사람들을 위주로 채용할 생각이구요.”

 

 

 

 

 

 

 

Channel 1. 로키

 

벽 너머에 들려오는 대화를 엿듣는 동안, 답답이는 스테반 로스차일드라는 사람에 대해 감화를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물론..... 대화 자체로는 그녀가 그런 느낌을 받을 만 하다는 건 인정한다. 대륙 최고의 경제 거물이 자신의 입장에선 대륙 촌구석에서 구멍가게 같은 일이나 하는 자에게 저런 따뜻한 소리를 한다면 누구라도 감명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보다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죄로...... 이 대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스테반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그들에게 손을 뻗는 걸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냉혹한 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사업 선배로서 조언을 하는 것이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백화점부터 시작하는 건 무리에요. 이번에 겪으셔서 알겠지만, 이곳 라스알게티는 라스알하게의 반란을 계기로 PBRC 같은 극우세력이 점차 힘을 얻어가는 구도입니다. 이곳에 언제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 달부터 우리 로스차일드를 대상으로 하는 테러가 발생하기 시작했어요. 나름 인프라를 잘 구축했다고 자부하는 우리에게도 그들은 상당한 골칫거리입니다. 하물며 이제 막 날개를 펴기 시작한 외지인...... 거기에 백화점 같이 상징성이 큰 사업을 하려고 드는 자라면, 그들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먹음직스러운 메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겠지요.”

 

저 말은...... 자신의 사업적 이득을 넘어서서 인간적으로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감정에 둔감한 나까지 이런 평가를 내리는데, 그 말을 눈앞에서 듣는 주설은 어떠하겠는가? 당장 내 옆에 앉아있는 답답이도, 말을 엿들으면서 가슴이 찡한 듯 한 얼굴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는 판이다. 이쯤 되면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의뢰주스테반 로스차일드와, 지금 이곳에서 걱정스러운 충고를 하는 스테반 로스차일드가 과연 동일한 인물인지 말이다.

 

그건...... 어느정두 각오하고 있어요.”

각오라는 말, 신념이란 단어만큼 장미와 비슷한 건 드뭅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만..... 함부로 손을 대다간, 가시에 손바닥이 남아나질 않게 되어 버리지요. 손을 뻗는 당신 뿐 만 아니라, 당신과 직간접적으로 연을 맺은 사람들 모두 말입니다.”

“......”

그래도......”

 

스테반 로스차일드는 잠깐 자신의 말을 멈추었다.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아서 그가 무슨 의도로 말을 중단했는지는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으나, 답답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걸 보니...... 그의 침묵은 이런 효과도 있는가 싶었다. 물론, 자신의 말을 누군가가 엿듣는다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거라고 생각해, 나는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잡았다. 답답이는 내 제제에 다리를 가지런하게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든 것을 다 감수할 생각과 의지가 넘치신다면, 저는 당신과 그 사업체를 주시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도전하는 젊음은 최고니까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그리고 아까 드렸던 작은 선물...... 허허 참, 저는 그냥 드리는 건데, 이걸 받은 사람들은 그 의미를 멋대로 해석하더군요. 그래도 뭐, 다른 것들과는 달리, 이건 제가 주시한다는 말을 하고 드리는 거니까...... 이것만큼은 호사가들의 뇌피셜이 맞다고 해 둡시다. 혹여나 사업상에 어려움이 생기면, 사용하세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Channel 2. 아이리스

 

로스차일드의 눈에 들었다라....... 절반 이상은 성공 했구먼.”

 

주설씨는 로스차일드 타워를 나서면서, 자신이 받은 명함을 빙글빙글 돌리며 혼잣말을 했습니다. 프로하기온에서 총독의 눈에 띄었을 때에도 이런 식은 아니었는데...... 그녀가 오늘 얼마나 긴장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그녀의 얼굴은 피곤함으로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고 할까요? 초췌하다는 단어가 사전에서 나와 현실의 옷을 입으면 딱 저렇겠구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근디 주사장, 참말루 백화점 사업을 할 참인가? ..... 로회장님도 저리 말씸 허시는디......”

로회장? 하하, 로스차일드 회장아냐?”

아따, 니는 뭔 곁가지 가지고 태클을 걸어 싸냐, 로회장이든, 로스차일드 회장이든 뜻만 통하면 되제는......”

 

저와 리겔이 으르렁거리는 사이에, 주설씨는 명함을 지갑에 넣으면서 생각에 잠긴 듯 했습니다. 확실히 로스차일드씨의 말은 일리가 있었거든요. 반란자의 도시에서 온 이주민...... 그녀의 사회적 신분은 딱 그 정도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백화점 사업은...... ‘어려운 도전이라는 단어로 간단하게 도매금 매길 수 없는 음......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어요.

 

PBRC도 그렇지만, ‘반란자의 도시에서 온이라는 수식어는, 확실히 사업에 방해가 됐으면 됐지 도움이 될 턱이 없어요. 현금보단 상품만 잔뜩 가지고 있는 그녀로선, 백화점을 런칭하기는커녕, 부지하나 매입하는데도 힘이 겨울 것이 불보듯 뻔해보였습니다. 융통 가능한 현금의 확보를 위해 파티에 참석했고, 로스차일드씨의 관심을 받는데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로스차일드씨는 지켜보겠다.’라는 추상적인 입장을 전했을 뿐, 사업에 투자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진 않았어요.

 

이 바닥은 어음보단 현금인디......”

 

이런 점에서, 한숨 섞인 그녀의 혼잣말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도는 수많은 고민들을 압축한 셈이었어요. PBRC를 비롯한 각종 방해세력을 제치고 사업을 안착시켜야 로스차일드의 시선을 붙잡아 둘 수 있어요. 그의 식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몸소 증명해 보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가장 큰 과업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기사단쪽의 유품 소지자를 찾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로키군의 말은, 우리가 사업이라는 과제에 몰두하느라, ‘필그림으로서의 과제에 눈을 감지 말자는...... 일종의 균형감각을 요구함으로써, 우리에게 전체를 조망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단 것은 잘 알지만...... 실지로 도움을 주기는커녕,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말이 나오자마자, 주설씨를 비롯한 우리 셋은 깊은 한숨을 쉬었어요. 일이 복잡해지다 못해,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걸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결을 해야하는거죠?

 

기사단쪽? 그래...... 그게 있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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