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좌파 정부 좌파 대통령

무명객혼돈 작성일 18.01.16 14: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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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에 좌익 출신의 대통령이 좌파 정부가 독재를 했던 암울한 시대가 있었죠

 

일단 이번에 정미홍과 강용석을 혈서 진위 여부로 법정 패소시켜서 벌금형을 매긴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을 

보겠으며

 

이를 보고도 민족문연구소가 거짓말이라고 우길 경우 해당 페이지와 스샷을 민족연구문제연구소에

제보 고발 조치를 요구하겠습니다

 

자 한 번 봅시다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사랑·2012년 2월호 

 

 

박정희 기념관 폐관 촉구 기자회견 성명서 기념관이 웬말이냐, 친일·독재 사과하라!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역사가 처참하게 능욕당하는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이 도서관이라는 가면을 쓰고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간 우리는 박정희 우상화의 본산이 될 기념관 건립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다. 

그 과정에서 국고보조금 지원이 일시 철회되는 성과도 거두었으나, 

수구세력의 집요한 압박으로 결코 만들어져서는 안 될 기념관이 들어 서는 참담한 결과를 빚고 말았다. 

국민들의 압도적 반대 여론을 무시하고 몇몇 대기업들의 기부금과 혈세를 동원 기념관을 개관한 일은 수구세력이 

저지른 또 하나의 반역사적 폭거로 기록될 것이다. 

 

무엇을 기념하겠다는 말인가? 

박정희는 안정된 교직을 팽개치고 삼수한 끝에 혈서지원이라는 묘수까지 써가며 자발적으로 황군의 장교가 되었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답다는 감탄을 들으며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거쳐 괴뢰 만주국의 군인이 되어 

항일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해방이 되자 기민하게 광복군에 편입하여 국내로 들어왔으며, 시류를 좇아 남로당에 가담하고 군부 내 좌익세력의 

핵심으로 암약하였다. 

여순사건이 일어나 사세가 불리해지자 숱한 동지들을 죽음의 나락으로 밀어넣은 대가 로 목숨을 부지하고 자리를 

보전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틈만 나면 쿠데타를 운위하며 정치군인으로서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마침내 기회가 오자 다수 군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5·16쿠테타를 일으켜 4월혁명의 정신과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https://www.minjok.or.kr/userdata/webzine/2012/201202.pdf 

 

 

 

 

 

 

 

민족문제연구소가 이명박근혜 정부가  서슬푸른 권력을 휘두루고 있는 2012년 2월

발행한 회보이며 이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이의 제기가 되지 않은 점을 보아 명백한 사실임이

확실한 자료입니다

 

하지만 이정도 자료는 부족하다고요?

추가 정보가 필요하시다고요?

 

이번에는 정수장학회(박정희의 '정' 육영수의 '수' 합해서 정수장학회)가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2001년 MBC에 방송된 분량을 요약해논게 있어 한번 보겠습니다

 

 

 

 

 

 

 

 

이 자료는 2001년 8월 17일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방영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박정희와 레드 콤플렉스 - 황태성 사건 

 

 

이완범(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박의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펼쳐진 것이 1946년 귀국 형이 구미에서 

인민당의 간부로서 사회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그 후 박정희는 1948년 여수반란사건때 국군내에서 남로당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반란군이 숙청되고 

좌익군인을 숙군하던 과정에서 검거 되었다. 

당시 육군참모본부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위치는 군사총책이었다.

 

당시재판기록 [1946년 남로당 가입, 군내 비밀세포조직, 무력으로 반란기도]

김정곤(당시 박정희심문) “남로당 총책으로 남로당에서 임명을 했고 박정희는 자기형이 공산당원이고 

대구 10월항쟁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혁명가가족이라고 해서 안심하고 시켰을지 모른다.”

 

결국 박정희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숙군과정에서 남한내 국군중 5%인 4700여명의 장병이 처벌 받는다. 

그 중 수백명이 총살, 징역을 산다. 그러나 박정희는 처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는다.

 

 

 

이 방송에 나와 있는 박정희의 친형 박희상도 한번 살펴 볼까요?

 

그 무렵 1961년 9월 황태성이 남파되었다.

서울에 잠입한 그는 구미에 사는 박정희 형(박희상)의 형수 조귀분을 찾아나섰다. 

조귀분은 김종필을 사위로 맞아 박정희와 김종필에게 연락할 수 있는 쉬운 사람이었다.

 

박준홍(조귀분, 박상희 아들) “저희 어머니는 황태성씨가 중매를 서고 결혼까지 하게된 사이였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봐서는 당연히 국가기관에 신고하셔야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렇지 못하여 괴로워 했다.”

 

임미정(황태성의 조카딸) “그 때 몹시 반가와 하시고 하였지만 굉장히 당황하였다. 

자기들 지위가 있으니깐 

자주회피하고 가서 의논해 보겠지마는 북으로 올라가라 했다.”

 

김종필 “밤에 장모한테 전화가 왔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황태성이  찾아왔다 마음이 불안했다라는 장모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종필은 황태성을 즉각 체포하고 수사과정을 비밀로 하였다. 황태성는 단순 간첩으로 분류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독방에 갇힌 그는 박정희와 김종필을 접촉도 못했다. 

 

    

 

                                 ---------------- 중 략-------------------

 

 

그리고 2년 후 황태성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제5대 선거유세가 치러지면서 황태성사건은 톱기사로 장식을 한다.

선거를 20여일 앞두고 박정희는 사상공세에 전면돌파를 시도한다.

간첩 황태성과의 관계를 인정한 것이었다.


“황태성은 나의 형과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집에도 놀러오는 사이였다.”


또한 박정희는 신문1면광고에 자신의 사상경력을 인정하고 야당인사들에게 

낡은 매카시즘이라고 공격하였다.

신문광고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할 공동의 전선에 서 있다. 

오늘 야당인사들이 얼마나 많은 지식인의 진보적인 발언을 매카시즘의 수법으로 탄압해 왔는가.]

 

아이러니 하게 박정희는 진보, 윤보석은 낡은 보수로 비추어졌다.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politic&N o=90887&bm=1 

 

 

제5대 선거유세에서 박정희 스스로가 자신이 좌익 남로당임을 인정했네요 ~

 

이 일을 어쩌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설마 반신반인 박정희가 국민들 앞에서 거짓말 했다고 우길래요?

 

그러니까 박정희가 가장 따르고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친형 박희상은 남로당 총책하다가 사형 당한 

 

진성 빨갱이고 자기가 사형시킨 간첩 황태성은 알고보니 박정희도 어릴때부터 보아오던 박희상의 죽마고우이네

 

뭐 이리 주변이 빨갱이 투성이야? 실망이지요?

 

하지만 아직 실망하긴 일러요~~

 

박정희가 애지중지 금지옥엽 키웠던 장녀 박근혜도 아빠와 삼촌의 영향을 받은건지 

 

북괴 김정일과 각별한 사이로 보이네요~

 

그리고 너님이 이글 안 읽고 스크롤만 내릴 것 같으니 나머지는 보기 좋으라고 내가 사진 자료 첨부해줄께

 

박정희 그러니까 다카키 마사오의 본명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가 가장 좋아하던 이름)의 장녀의 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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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박근헤는 김정일과 무려 3시간을 밀실 회담을 하지

 

3시간이나~

 

자 ~ 이제 우리나라 좌익 대통령 좌익 정부가 누구였는지 잘 알겠지요?

 

그리고 반박하고 싶으면 욕설로 무마하지 말고 근거자료 가져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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