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가 다수를 이긴 전투

_연 작성일 14.08.29 16: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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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마라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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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 제국의 부활 초기에 잠시 등장했던 전투입니다. 현재 마라톤이 탄생하게된 배경이기도하죠.

때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 BC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대왕이 보낸 그리스 원정군은 낙소스등을 점령한 후 아테네를 공략하기위해 마라톤에 상륙하게됩니다.

아테네의 장군들은 밀티아데스의 제안에 따라 마라톤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작전을 세우고, 최고무관 칼리마코스 지휘하에 약 1만의 중장보병군을 급파하여 마라톤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포진하였는데, 사실상 아테네군은 넓은 평야에서 최강의 페르시아 기병대와 싸워 이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죠. 보병은 기병한테 정말 쥐약이니까요.

양군의 대치상태가 수일간 계속되던 중 페르시아군은 주력부대를 승선시켜 해상으로부터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아테네군은 페르시아 기병대가 잠시 진영을 비웠다는 사실을 알고 이에 총사령관 밀티아데스가 페르시아 보병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바다로 철수하죠. 이때 그리스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0 km를 달려 승첩을 알리고 절명하였다는 고사가 있는데, 마라톤 경주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1만여명) 사상자 192 < 페르시아 군(1만5천여명) 사상자 6400

질높은 소수의 병력(중장보병, 홉타이트)으로도 전술이 뛰어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준 최초의 전쟁으로 평가됩니다.

 

 

2. 테르모필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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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유명한 300에서 등장했던 전투입니다,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그리스로의 세 번째 침공을 준비하던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486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 크세르크스1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크세르크세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만큼 그리스 침공을 위하여 많은 준비를 해나갑니다.

기원전 481년 드디어 30만의 페르시아 군사는 그리스를 향해 육로와 바다로 동시에 진격해나가기 시작하는데,이를 전해들은 그리스 진영(그리스 본토와 폴리스들)은 코린토스에 모여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방어태세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항하고자 테르모필라는 지역을 이용한 군사작전을 수립합니다.

테르모필레는 마케도니아 해안에 위치한 좁은 골짜기로 그리스로 가자면 꼭 통과해야 하는 지역이었으며 지역 특성한 많은 수의 병력이 지나가기엔 무리가있었죠. 따라서 아테네의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곳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해상전투를 통하여 페르시아 해군을 먼저 무찌를 전략을 수립해나갑니다. 작전에 따라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를 총지휘관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 7천명은 테르모필레 지역으로 파견됩니다.

테르모필레 지역에 도착한 후 며칠간 그리스 진영을 정찰한 페르시아 군대는 도착 5일째 되는 날 그리스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지형상 많은 병력을 투입할수가없어, 페르시아 군은 그리스 연합군에게 의해 번번이 저지를 당하고 맙니다. 그러던 중 그 지역의 한 그리스인(에피알테스)이 페르시아 군대에게 그리스 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다고 밀고하는데,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근위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협로를 반드시 지킬 것이며 동맹군의 주력군은 목숨을 건져 다음 전투에서 싸울 수 있도록 대열을 해체하고, 이 명령에 맞서 300명의 스파르타군과 함께 끝까지 협로에 남은 군사들은 테스피아이 병사700명, 테베의 친그리스파 병사 400명 등이 남게되었죠.

레오니다스와 그의 군사들은 페르시아에 강하게 저항했으나 뒤쪽에서 급습을 받은데 연이어 페르시아 지원부대의 전방 공격까지 받게되자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인고, 결국 이 전투로 인해 레오니다스 를 비롯한 군사전원 사망하기에 이르게됩니다. 뒤이어 분산되어 있던 연합군도 곧 페르시아군에게 제압당하고,테르모필레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사기가 높아진 페르시아 군은 아르테미시온까지 뚫고 아테네로 진격하였으나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군에게 크게 패하고 맙니다.

 

스파르타 300 정예 포함 약 1천5백명(협곡에있던 병력 전멸) > 페르시아 군 본대(추정 100만) 사상자 추정 1~2만

 

"지나는자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

 

 

3.살라미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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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아르테미시온의 방위선을 돌파한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 대군은 파죽지세로 아티카를 점령하였으나 살라미스의 그리스군 공격이 여의치 않아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때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피난시키고 거짓 정보를 보내어 페르시아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灣)으로 유인하여 11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테미스토클레스의 속임수를 덥썩 문 페르시아 함대는 살라미스 해협에 진입하여 두 입구를 막으려 하였으나, 해협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함들이 이동하려 하면 오히려 흩어져버려 오히려 이들의 수적 우세는 장애가 되어버렸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리스 함대는 전열을 이루어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최소한 200여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선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그리스 연합군 378척 > 페르시아 800여척

 

 

4.가우가멜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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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르벨라전투라고도 한다. 이수스전투 (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BC 333년 11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의 대군을 쳐부순 싸움을 일컫는다. 싸움의 결과, 다리우스는 패주하고 왕모와 왕비 및 왕자들은 포로가 됨)에서 패한 다리우스 3세는 3만 달란트의 금과 페르시아 제국의 절반, 그리고 왕녀를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화평을 청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이를 거절합니다. 

양쪽 병력은 페르시아군(軍) 약 20만 명에 대하여 헬라스 동맹군은 약 4만 7000명.

BC 333년 이수스전투에서 그리스의 용병으로 구성된 보병을 잃은 다리우스 3세는 코끼리·전차·기병을 중심으로 하여 2중으로 횡진을 폈으나, 헬라스 동맹군은 그 좌익을 강습하여 다리우스 3세를 패주하게 함으로써 알렉산드로스대왕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 주게됩니다. 장창을 이용한 유명할 팔랑크스 진형의 위력과, 망치와 모루라고 불리우는, 상대 기병을 보병으로 붙잡아 놓고 우회한 기병이 적 본대를 쳐부수는 전략이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전투 결과, BC 331년 페르시아왕국은 멸망하고 알렉산드로스대왕은 전(全)페르시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동맹군측은 예비군을 교묘하게 용병하여 전쟁사에서 예비군을 쓴 최초의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는 무리한 용병 고용으로인해 곤욕을 치르기도하죠.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본대 약 4만7천명 > 페르시아 다리우스3세 20만여명

 

 

5.칸나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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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는것은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면, 길을 만들어라"

한니발 바르카스 BC247~BC183

 

 

칸나에전투는 제2차 포에니전쟁 중이던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중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에 평원에서 로마 공화정군과 카르타고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던 카르타고군은 완벽한 포위 작전으로 로마군을 전멸시켜 전사상 포위섬멸전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유명한 전투이죠.

기원전 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침입하자,(사실상 로마는 알프스를 넘어올꺼라고는 상상하도 못했죠)

이를 막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했고 파비우스는 지구전으로 카르타고군을 소모시키는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자, 파비우스의 작전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 시민들이 한니발과의 결전을 촉구했고,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마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를 집정관에 임명하였습니다. 이들은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약 8만의 군단을 이끌고 약 5만의 카르타고군과의 전투에 나서게됩니다.

로마군의 보급지인 칸나에를 점령한 한니발은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 보병을 상대로 경보병과 주력인 중장보병을 정면에 두텁게 배치하고 양익에 로마군보다 우세한 기병대를 배치하였다. 칸나에 전투당시 한니발은 로마의 주력 부대를 포위 섬멸하였는데, 이는 포위 섬멸전의 교과서적 예라 할 수 있어서 모든 사관학교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전투이기도 하다. 로마의 집정관 바로는 우세한 병력을 살려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적 주력을 분쇄하는 교과서적 진형을 펼쳤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군 보병을 상대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경보병과 주력인 중장보병으로 정면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적 주력을 끌어들이고 동시에 우세한 기병대를 이용하여 로마군의 측면을 보호하는 기병을 빠른 시간 안에 물리치는 전술을 구상하였다. 중앙의 경보병과 중장보병이 로마군의 보병주력을 잡아 두는 사이 양익의 기병대로 포위진을 형성하여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위섬멸전을 통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한니발 카르타고군 5만(사상자 약8천여명) > 로마군 5만 이상이 전사

 

 

6.파니파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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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 4월, 무굴의 지도자 바부르는 유목민 기마 궁수와 20대 가량의 대포를 갖춘(당시 인도에는 대포가 도입되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의 포병으로 이루어진 1만 5천의 군대를 이끌고 델리로 진격했다. 그에게 맞서기 위해 술탄 이브라힘 샤 로디는 4만 명의 군사와 100마리의 전투용 코끼리를 배치했지만, 대포는 갖고 있지 않았죠.

바부르는 수적으로 열세였으므로, 델리 북쪽의 파니파트에 수송 마차를 이용해 방어 진영을 준비했습니다. 오스만 대포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사슬을 쳐서 기병대가 돌격해 와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게 했죠. 며칠간 교착 상태가 지속된 이후 4월 20일 새벽녘에 이브라힘이 선두에 서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부르의 대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브라힘의 전투 코끼리들 상당한 전투적인 역할을 해줄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대포 소리에 겁을 먹어 달아나버려 뛰어가는곳마다 로디의 군대를 짓밟고 대열을 무너트리게됩니다.

그 후 바부르의 기병대가 측면을 공격해 압승을 거두게되죠. 이브라힘을 비롯해 그의 군사 1만 5천 명 이상이 이 전투에서 죽었지만 무굴 편의 손실도 상당했습니다.

바부르는 한 주 후 델리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여, 이로써 200년간 인도를 지배하게 되는 무굴 제국을 세우게됩니다. 바부르는 아그라에서 승리를 경축했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받았고. 현재 이는 영국 왕관에 박혀 있다고합니다.

 

 

바부르 약 1만5천 > 이브라힘 샤 로디 4만 + 100마리 전투 코끼리(사실상 궤멸)

 

 

"칼리프들은 많은 시체 한가운데서 이브라힘의 시신을 찾아내 내게 그의 머리를 가져왔다"

바부르, -바부르 황제의 일기-

 

 

 

출처 - 루리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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