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가 그린 한국 전쟁

dol2da 작성일 14.09.30 00:3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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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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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을 들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테'가 전쟁화보와 함께 전쟁의 전개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함으로써 프랑스는 물론 유럽의 많은 지식인이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식하였으며 그에 부응해 반전평화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발로리스에 체류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뤼마니테'가 전하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사를 참고하며 1950년 9월부터 제작에 착수, 1951년 1월 18일 '한국에서의 학살'을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을 내용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미군이 신천군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살해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면서 전 세계의 좌익이나 진보운동진영의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전문가인 박명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사건은 미군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한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반공우익 민간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일 가능성이 큽니다. 

즉 북한군이 황해도에서 퇴각하면서 우익민간인 400여 명을 살해하자 한국군의 북진에 앞서 광복동지회를 결성한 신천 지역 우익인사들이 10월 13일 봉기를 결행, 공산정권에 부역한 자들을 닥치는 대로 숙청한 결과 600여 명의 좌익인사들이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결국 신천학살은 우익들의 반공 봉기과정에서 빚어진 좌우익의 상호 살육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천학살은 피카소가 그림을 구상한 이후에 일어났으며 더욱이 신천학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신천학살을 주제로 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피카소는 '뤼마니테'가 전하는 기사에 의존하여 한국전쟁을 상상했고,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이 가졌던 보편적인 반전평화사상에 따라 이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마치 기계처럼 무자비한 처형을 집행하는 군인과 그 앞에선 희생자를 대비시킨 작품의 구도와 형식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점령군에 맞선 스페인 마드리드 시민들의 저항을 잔혹하게 보복한 현장을 그린 고야의 '1808년 5월 3일'과 마네의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으로부터 빌려온 것으로써 피카소는 그것을 입체주의와 자신이 1920년대부터 추구했던 신고전주의 방식으로 번안했던 것입니다. 

이 그림이 발표되자 미군 당국은 즉각 학살 연루를 부정했으며, 프랑스 공산당조차도 이 그림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비난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전쟁에 대해 반대한다는 메시지와 보편적인 휴머니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은 '게르니카'가 바스크인들이 사는 도시에 대한 융단폭격의 참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을 도덕의 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는 피카소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학살'이 1951년 '살롱드메'에 출품됐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미술계는 혼란과 당혹에 빠졌습니다. 특히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피카소가 미국을 한국전쟁의 원흉으로 몰고 가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책동에 동원된 위험인물이자 공산주의자이며 심지어 소련의 첩자로 분류하여 25년간 그를 사찰했습니다. 


이 작품이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란한 미술가들에게 알려지면서 피카소는 한국에서도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김병기는 부산의 한 다방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선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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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로 피카소 1952년 작품 전쟁과 평화 윗 그림이 '평화', 아래 그림이 '전쟁'


1954년 발행된 잡지 '문학예술'의 창간호에 김병기는 1952년 어느 날 부산 남포동의 한 다방에서 낭독했다는 '굿바이 피카소'란 글을 발표했다. 

그가 피카소와 결별을 선언한 것은 '타임'에 소개된 '한국에서의 학살' 때문이었다. 당시 다방에 모였던 미술가들에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타임'과 같은 시사지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였다. 

김병기는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해 "미군 기계화 부대가 벌거숭이 우리 민중을 향해 총을 쏘는 극심한 선전미술"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 있던 최승희의 남편이자 열성적인 좌익문학가인 안막이 그것을 북한에 유리하도록 대서특필한 사실도 그를 자극했다. 

그는 결별선언문에서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피카소는 발로리스의 한 지역 유지로부터 로마네스크 풍의 낡은 성당('평화의 사원')을 장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두 점의 대형그림을 1952년 10월에 완성했다. 

두 그림 중 '전쟁'은 창과 방패, 정의의 상징인 저울을 든 남자 전사와 전쟁을 상징하는 괴물을 병치시킨 것이다. 전사의 손에 쥔 방패에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반면에 전쟁을 상징하는 칼, 창, 도끼를 휘두르는 병사들의 실루엣을 경계로 맞은편에는 머리에 뿔이 달린 괴물이 한 손으로 피묻은 칼을 휘두르고 있으며 다른 손으로는 해충을 퍼뜨리고 있다. 

'전쟁'에 등장하는 도상 중에서 서로 대척지점에 있는 비둘기와 해충은 한국전쟁과 반전운동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해충은 북한과 중국이 선전했던 세균전에 대해 암시한 개연성도 있다. 당시 북한정권 외무상 박헌영은 1951년 5월 유엔에 미군이 1950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천연두를 퍼뜨렸다고 공식항의했다. 중국과 소련의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뤼마니테'(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역시 이 선전전에 동조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세균전에 대한 의혹은 북한이 이녹, 퀸, 오닐 등의 미군 포로들의 자백을 공개하면서 증폭되었다. 

때마침 피카소의 친구이자 문필가인 르와가 프랑스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1952년 6월 북한을 방문하여 이녹을 만났을 때 세균전에 대한 폭로가 북한의 강요에 의한 거짓자백이자 석방을 전제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고백을 듣고 그 사실을 서방언론에 발표했다. 따라서 '전쟁'에 나오는 해충이 한국에서의 세균전을 상징한다는 것은 추정에 불과하다. 게다가 당시 세균전의 진위여부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피카소가 미군의 부도덕성을 공격하기 위해 이런 이미지를 채택했을 것이란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병기는 피카소가 '레지스탕스의 시기에 코뮤니스트들이 가장 용감했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작했을 것으로 추론하며 "코뮤니스트가 된 이후에 당신의 작품이 의도하는 에스프리가 점점 피상적인 리얼리티의 파악으로 흐르고 있다"고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도 "치졸한 극락도와 지옥도로 변하였다"고 단정했다. 

김병기의 시각에 피카소의 작품들은 리얼리티 정신을 배반한 것이었고, 더욱이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을 강조해 이 그림들이 코뮤니스트의 공식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김병기의 시각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사회를 휩쓸었던 매카시즘의 정책과 정서에 의해 강화된 반공주의적 정보만을 취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김병기의 결별선언은 이런 반공정서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 교수·미술평론가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1406&logId=56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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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한국전쟁에 관심이 많았고, 평화를 굉장히 열망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를 많이 그렸는데요. 다양한 모습의 비둘기와, 소녀가 안고 있는 비둘기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에도 피카소의 이 비둘기 작품이 쓰였다는 걸 아시나요?

 

그곳은....바로, '판문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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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런데 지금의 판문점과는 다른 모습이죠? 

지금의 판문점이 지어지기 전, 회담소로 지은 건물로 지금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정면엔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 조각되어 있습니다.


피카소가 평화를 바랬던 마음을 담아,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바람을 담아, 한반도 평화를 가져오길 바라며 '평화의 비둘기'를 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회담장에서 평화를 몰고 올 수 있게 말이죠. 하지만 판문점은 새로 지어졌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긴장과 냉랭함이 흐르는 판문점. 그 옛날 평화를 바라며 비둘기를 달아 만들었던 것처럼 어서 그 자리에, 한반도에 평화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때엔 '평화' 그림처럼 사람들이 춤을 추고, 놀고, 누우며 평화를 만끽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카소는 지상에 없지만 그 뒤를 잊는 화가들은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찾아온 평화를 축하하는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네요. 아마 하늘에 있는 피카소도 기뻐할 겁니다.


피카소가 한국과 많은 인연이 있다는게 참 신기하지 않으신가요?

이제 판문점이 분단의 상징이 아닌 비둘기평화공원으로 바뀌는 그날을 기원합니다!


http://blog.unikorea.go.kr/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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