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 길어요) 조선시대 왕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eygerik 작성일 14.10.21 23: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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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
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
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
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 과거시험을 치루는데 채점관들이 보기에 두명이 너무 훌륭해서 누구를 장원급제로 찍어야 하나 
고민고민하다가 태종한테 가서 전하께서 가려주시옵소서 했는데 
태종이 껄껄껄 웃더니 답지 펴보지도 않고 내가 집은놈이 장원이야 하면서 생각도 않고 그냥 둘 중에 한장 집어들었다 한다




< 세종 >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준 
얘기도 있다(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
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
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
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대는' 바람에 모친 3년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
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 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
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
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은 웃으며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
기 때문이다





< 문종 >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
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3. 조선왕조 역사상 최초로 정실부인 소생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다





< 세조 >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
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세조가 단종을 죽인 후 단종의 모후이자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고 세조에게 침을 뱉자 
현덕왕후의 무덤을 물가로 이장하기도 하고 
온몸에 부스러기가 나자 치료를 위해 명산사찰을 찾아다니기도 하였고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어머니와 맡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사람들은 현덕왕후의 저주때문이라고 했었다

4.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아 몸에 부스러기가 생긴 세조가 치료를 위해 명산사찰을 찾아다니다 상원사로 가게 되었는데 
세조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법당안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고양이 한마리가 나타나서 세조의 곤룡포를 물고 늘어지는데
세조가 쫒으려 해도 고양이가 계속 곤룡포를 잡아당기자 세조는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어 법당에 들어가지 않고 
군사를 시켜 법당을 수색하게 하여 법당을 수색한 군사들은 불탑아래 숨어 있던 자객들을 잡고 보니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세조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이었고 화를 면한 세조는 고양이를 찾았으나 고
양이는 이미 사라져 버렸으므로 세조는 강릉에서 기름진 땅으로 500석지기를 장만하게 하여 
절에 헌납하면서 그 고양이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 주도록 했다


5. 무더운 여름에 상원사에 있는 중 홀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 보니 시냇물이 웅덩이져 흐르는 곳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을 했는데 
물은 참으로 맑고 시원했으나 주위에서 누가 볼까봐 조심하고 있는데 
숲속에서 파란옷을 입은 동자가 옷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와 세조에게 목욕을 해 주겠다고 자청하며 
세조의 등을 문지르기 시작하더니 세조의 온 몸에 난 종기가 벗겨져 내리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는데 
세조가 동자에게 다른 사람에게 자기 몸에 손 댔다고 얘기하지말라고 하자 
동자는 약속을 지키겠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더니 사라졌는데 
이후 세조의 몸에 난 종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성종 >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
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
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관리
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2.성종은 보통 양반처럼 옷을 입고, 무관을 두엇 데리고,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 보기를 좋아하였다. 
성종이 돌아다니며 생긴 이야기를 후에 사람들은 성종의 미행일화라 하였다. 

3. 조선때 성종시절을 뛰어넘는 살기좋은 시절은 없었다. 성종의 정치적 능력과 행정능력은 가히 먼치킨에 가까웠다




< 연산군 >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
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
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중종 >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
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 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
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 인종 >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
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
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 명종 >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
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 선조 >



1.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
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지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
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선조는 부인들 중 공빈 김씨를 가장 사랑하였다. 공빈은 아름답고 교양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 하루 종일 공빈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다른 후궁들은 만날 틈도 없었다고 한다.
광해군은 공빈의 아들이며 공빈은 광해군을 낳고 2년 만에 죽는다.

3. 선조는 임진왜란이 나자 가장 먼저 짐을 싸들고 도망쳤다.
18살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선을 떠맡겼다고 한다.





< 광해군 >



1.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
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됩니다"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2. 광해군은 준수한 인상이었는데, 반듯하면서도 날카롭게 생겼다고 한다.

3.광해군은 매사에 논리적이고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격과는 달리
친족이나 주변인들에게 매우 약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형이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다.
대신들이 임해군의 죄목을 속속 고하면서 재촉하자, "차마 법대로는 못 하겠으니 선처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명했다고한다.

4.광해군은 큰 병은 앓지 않았으나 사소한 질병은 잦은 편이었다.
감기로 인해 두통이 심할 때가 있었다.
그때 대신들이 찾아와 마음에 안드는 애기를 하자 "귀찮게 하지 말라"며, "가서 책이나 읽으라"고 했다.

5.광해군은 왕이 되고 얼마 동안은 주기적으로 눈병을 앓았다.
그러면 눈동자가 빨개지곤 했다. 대신들 중 광해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광해군이 노려보는 것을 두려워 했다.

6.광해군은 친국(왕이 직접 죄인을 대함)을 매우 자주 했다.
밤을 새서 해가 뜰 때 까지 심문한 적도 많았다.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광해군의 성격 때문으로 죄인을 확실하게 가리기 위해서였다.

7.광해군은 고문 받은 죄인들을 추국이 끝나는 즉시 바로 의원과 각종 약재, 탕약 등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그 다음날 추국하고 또 치료하기를 반복하였다.
이 역시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 효종 > 




1.부왕인 인조를 닮아 용모가 수려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아는지, 
스스로의 외모와 풍채에 매우 만족하여 항상 거울을 볼 땐 입가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3.봉림대군 시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볼모로잡혀갔을 때, 심심했던 봉림대군은 하인을 시켜 사주를 보게 한다.
시간이 지나 하인이 결과를 들고 왔는데, 읽어보니 왕이 될거라는 내용이었다.
봉림대군은 놀라서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고한다.



< 숙종 >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 관우의 팬이었다 한다




< 인조 >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
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2.인조는 홍시를 좋아했다. 소현세자도 홍시를 좋아했다. 봉림대군(효종)도 홍시를 좋아했다.
세 부자는 모두 모여서홍시 먹기를 즐겼다.




< 영조 >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
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
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
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
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
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
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 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 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
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
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 정조 >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
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끈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임금이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주려고 시험을 열었는데,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맨날 3등만 
해서 결국 화나서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하면서 베개를 던졌다





< 헌종 >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
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이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많이 유혹을 했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
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
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 고종 >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
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
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 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고종의 말)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4. 고종은 즉위하자마자 "궐문밖의 군밤장수 아무개를 죽여라, 그놈은 나에게 단 한번도 군밤을 공짜로 주지 않았느니라"라고 했다.
그의나이 1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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