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반역자,

몬스터에그7 작성일 16.12.25 15: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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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친일파, '고문귀신' 하판락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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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하판락은 1930년 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 2월 처음 순사로 일제 경찰이 되었다.

그런 하판락이 사천경찰서를 거쳐 38년 부산 수상경찰서의 순사부장과 경부보로 승진하면서 고등 경찰로서 '고문 귀신'이라는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고문 경찰'의 대명사가 된 자가 '이근안'이라면 일제시대 최고의 고문 경찰은 바로 '하판락'인 것이다. 그 악행이 얼마나 극심했으면  '고문하는 귀신'이라는 '고문귀'가 그의 별명이었겠는가. 

하판락이 이같은 악명을 얻게된 계기는 1930년대 말 신사 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명을 집단 고문하면서부터 였다. 이 당시 고문당한 김준기씨 증언에 의하면 하판락은 자신 역시 조선인 출신이면서도 '조센징' 운운하며 심한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이에 김준기씨는 "같은 동족의 몸에 그렇게도 심한 고문을 할 수 있었던 그의 행동에 대해 나는 심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며 분개했다. 

하판락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한 고문 행위가 얼마나 극악했던가에 대한 또 다른 독립운동가의 고발이었다. 1943년 이른바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검거된 여경수와 이광우 등 7~8명에 대한 고문이 그것이었다.

당시 하판락은 독립투사 여경수에게 자백을 강요하면서 거듭 부인하는 그의 온몸을 화롯불에 달궈진 쇠 젓가락으로 지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전기 고문, 물 고문, 다리 고문 끝에 여경수, 이미경 등 3인이 끝내 절명한 것이다. 또한 그나마 살아남은 이광우 선생을 비롯한 같은 사건 관련자의 운명 역시 크게 다르지 못했다. 하판락의 잔혹한 고문으로 모두가 신체 불구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문받아 만신창이가 된 그들은 이후 재판에 넘겨져 4년 이상의 감옥 생활을 또 겪어야 했다. 한편 이러한 잔혹한 고문 덕에 하판락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

 

1943년, 하판락은 당시 사상운동 조직 사건으로 체포되어온 이미경 등을 고문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는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물었고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착혈 고문'이었고 결국 이같은 고문 끝에 여경수 등 독립투사 3명이 목숨을 잃었고 설령 살아남은 이들은 신체 불구자가 되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그를 만나면 직이뿌라. 그는 사람이 아니다. 인두껍을 쓴 짐승이다."

하판락의 고문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폭로한 이광우 선생. 그는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증거 수집차 하판락을 만나러 간다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해방후 하판락,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최근 독립운동가의 후손 분들을 몇 번 뵐 기회가 있었다. 그때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 이 나라 현실을 두고 안타까움을 표현하자 그 분들이 하신 말씀중에 내 가슴을 치는 몇 마디가 있었다. 독립운동가 차리석 선생님의 아들 차영조 선생님의 말씀도 그중 하나였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이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씀이셨다. 갑작스러운 말씀에 멀뚱히 바라보니 그분 말씀이 "진짜 해방된 것은 친일파"였다고 덧붙였다.

선뜩 이해하지 못한 나에게 그분은 "일제 강점기 친일파들이 잘 먹고 잘 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본 놈들 아래에 있었던 거잖아요. 순사도 경찰서장은 일본 놈이었고 관리도 높은 직책은 일본 놈들이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45년에 일제가 패망하여 물러나니 그 후에는 그나마 자기들 위에서 지배하던 일본 놈들도 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친일파들이 차지 했잖아요. 경찰서장이고 장관이고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해방된 자들은 바로 친일파 아닙니까"라는 것이었다. 

하판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일 경찰 하판락은 '오히려' 더욱 잘 나갔다. 해방후에도 하판락은 미 군정의 '일제 관리 재등용 정책'에 따라 여전히 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인 적산 재산 처리에 관여하며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46년 6월에는 경남 경찰청 수사과 차석으로 승진되었다. 

그러한 하판락에게 잠시나마 역사적 단죄가 찾아온 것은 1949년 1년의 일이었다. 하판락이 부산에서 반민특위에게 체포된 것이다. 하판락의 고문으로 사망한 독립투사 여경수의 어머니가 그를 반민특위에 고발했기 때문이었다. 1949년 당시 고원섭이 쓴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하판락을 체포한 반민특위가 그를 서울로 압송하려 하자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 달라"며 부산시민들이 애원할 정도로 하판락에 대한 분노가 충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서울로 압송되어 반민특위에 의해 강도높은 조사를 받았으나 하판락은 끝내 자신이 한 독립투사 살해 및 착혈 고문 사실 등을 끝끝내 부인했다. 그러다가 1949년 6월 6일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건 발생후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하판락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형성한 재력을 가지고 사업가로 변신, 엄청나게 많은 돈을 모았고 2003년 9월까지 향년 92세의 천수까지 누리며 살다가 떠났다. 친일파로서 가장 끝까지 살다가 떠난 이가 하판락이었다. 2002년 2월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에서 친일파 708인 명단을 발표할 당시 명단에 든 대상자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던 친일파가 바로 하판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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