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민주화.

작성일 08.10.31 22: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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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명씩 묶어놓고 사살, 고랑에 쳐넣어

『내가 끌려나가기 며칠전부터 밤마다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어요. 고문하는 줄 알았지. 그것이 죽음의 비명일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우리 감방 사람들도 한명씩 불려 나갔습니다. 내차례가 되어 나갔더니 철사로 두손을 묶고는 형무소 뒷쪽으로 끌고 가는거예요. 앞서 끌려간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방이 깜깜했어요. 문이라고 짐작되는 곳을 지내는 순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체가 즐비한 밭고랑 사이에 누워있는 겁니다. 머리와 허벅지가 굉장이 아팠어요. 뭘로 맞았는지 모르지만 뒤통수가 쑥 들어갔고, 칼로 찔린 허벅지에는 피가 응고돼 있었습니다.

내가 꿈틀대니까 내주위에서 시체를 뒤적이던 사람들이 철사줄을 풀어주었습니다. 그길로 엉금엉금 기어서 형무소옆 논에 고인물을 먹고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로 물든 팬티 하나 걸치고 논두렁에 쓰러져 있는겁니다. 인민군이 도망갔다는 얘기를 듣고 옷을 구하기 위해 형무소로 들어갔습니다. 감방은 텅 비었고 우물엔 돌멩이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6사(舍)1호의 옷보관 창고에서 헌옷을 꺼내입고 대전형무소를 떠났습니다…』

이씨 이외의 나머지 3천여명(당시 유엔군사령관은 5천여명으로 추정)은 어떻게 학살됐나? 그 진상의 일단을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마크 w. 클라크장군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살펴본다.

『…1950년 9월 20일,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백명 내지 2백명 정도로 구성된 (대전형무소) 수감자 수개반을 야간을 이용, 교묘하게 감방에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손을 등뒤로 묶고 다음에는 그들을 연쇄적으로 이어서 결박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묶인 상태로 미리 예정된 학살장소에 수송됐습니다. 그들은 이미 패여있는 길다란 고랑에 쳐놓고 사정없이 사살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생존자가 있는가를 조사한후 발견되면 머리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흙을 덮어 집단매장을 했던것입니다. 이 흙은 조급하게 덮어졌기 때문에 얇아서 피로 물든 그 자리를 즉시 판별할수가 있었습니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교회서 학살

1950년 9월26일에 이르자 이 악귀같은 공산당 내무서원들은 철수 이전에 학살을 끝내기 위해 더욱 서둘렀습니다. 내무서 구내에도 구덩이를 파고 북한군의 지원까지 받아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을 계속했습니다. 걸을수 있는 군인포로는 몇사람씩 끌어내어 즉시 죽여버렸고, 부상한 수명의 미군포로들은 들것에 실어 구덩이로 끌고가서 사살 또는 때려 죽였습니다.

시간에 쫓기자 공산경찰인 내무서원들은 아직 처치하지 못한 반공인사들을 이미 시체로 꽉찬 구덩이에 끌고가서 그위에 계속 쓸어넣고 죽였습니다. 천주교 교회내에 수감했던 사람들도 *개처럼 서둘러 학살했습니다. 구덩이가 시체로 넘치자 나머지 수감인들은 교회의 구내나 지하실에서 학살 했습니다. 우물속으로 던져버린 시체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몸서리 나는 학살극을 끝낸 공산 악귀들은 도주하여 버린것입니다.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불은 시체가 꽉차

시체를 검시(檢屍)하여보니 대다수가 학살되기 전에 구타당하여 몸이 성한데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수천명의 희생자들 가운데에 생존자는 일반 민간인 3명, 한국군 병사 1명, 미국인 2명을 합해 불과 6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수천의 시체들은 모두 발굴되었습니다.』

이어 클라크장군의 다음과 같은 맺음말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고 한국민을 한층더 부끄럽게 하는 구절이었다. 『전대미문의 이 학살극은 바로 한국민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요!』

그러면 공산당의 비인간적 대량학살의 태풍이 스쳐간 직후 현장에 달려간 몇몇 사람의 증언을 들어보자. 1950년 10월 3일 유엔군이 대전을 탈환한 직후 대전형무소로 복귀령을 받고 선발대로 달려간 이준영(李俊榮•78)전교도관.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형무소 취사장 옆에 있는 직경 1m짜리와 2m짜리 두개의 큰 우물에 퉁퉁 불은 시체가 꽉 차 있었습니다. 우물위로 사람의 머리가 삐죽삐죽 나와있는데 모두 썩어가고 있었죠. 시체 썩는 냄새에 오장육부를 다 토해낼 지경이었습니다. 10여명 이상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우물속에다 집어넣고 기어나오지 못하게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돌과 기왓장을 함께 넣었습니다.

그 위에다 또 수십명의 사람을 쳐넣어, 마치 단무지 담그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차곡차곡 포개서 생수장(生水葬)시켜 놓았습니다. 한 우물속에서 끄집어 낸 시신이 1백구(具)가 넘었습니다.』

이씨의 증언은 계속 이어진다.

『형무소 구내를 한바퀴 돌아보니 취사장 옆의 우물 두군데와 농사를 짓기위해 설치한 온상(溫床)속에 시체가 집단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온상에는 길이 60m 가량의 고랑이 양쪽으로 두개가 있었습니다. 양쪽 고랑에 각각 두줄로 시체가 포개어져 있었습니다. 어림잡아 2백구가 넘었습니다.』



2004-07-02 오후 9: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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