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악령 3

씨바둥 작성일 17.07.10 00: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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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색조의 조장으로부터 잡은 사람에 대해 들
었어요. 그는 포상 휴가를 가게 될 거라고 들
떠 있더군요.
“글쎄 그 자식은 죽어도 여기가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거야. 자식이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말이지.”
“어떻게 생겼는데?”
“얼굴이 온통 시꺼면 수염으로 텁수룩하더
라고.”
“나이는?”
“한 서른쯤 되어 보였어.”
“소지품은 뭘 가지고 있었는데?”
“텐트가 숲 속에 처져 있더라고. 텐트 안에
는 이상한 책하고 낯선 도구들이 가득 차 있더
라. 책은 일본책도 있었고 영어책도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뭐냐고 물으
니까 무슨 심령 어쩌구저쩌고 하더라고.”
“수색조가 다가갔을 때 그는 뭐하고 있었는
데?”
“부처님처럼 척하니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거야. 총부리를 들이댔는데도 가만히 있더라
고. 이 자식이 괜히 그러는 거다 싶어 눈뜨라
고 소리 쳤지. 그랬더니 그제서야 눈을 뜨고
우릴 천천히 돌아보는 거야.”
“뭐하는 작자래?”
“뭐, 자기는 심령술사인데 수도하는 중이라
는 거야. 내 그놈이 심령술사인지 마법사인 알
게 뭐야? 그래서 잡아왔지.”
“순진한 민간인을 생포해 왔구만?”
“순진한 민간인? 얀마, 순진한 민간인이 통
제 구역 안에서 수도합네 하고 죽치고 있는 것
봤어? 내 보기엔 그놈은 공비는 아니라고 하
더라도 그 두 사람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
을 거야. 조사를 하고 있으니까 조만간 밝혀지
겠지. 그 놈이 만일 살인자라면 나는 포상 휴
가를 가게 되겠지? 밖에 나가면 네 애인을 불
러내 실컷 놀아야지!”
“뭐 인마?”
나는 내무반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어요. 그러던 중 저녁 식사 시
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갔죠. 식당에서 연대장
당번병을 만났어요. 나는 그 자식을 조용히 뒤
를 끌고가, 잡아 온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보
았죠.
그 사람 때문에 작전참모하고 연대장이 문
을 닫아 걸고 한동안 의견을 주고 받았다는 거
예요. 뭔지 모르지만 연대장과 작전참모는 그
사람을 만나서 뭔가를 부탁하기로 했다고 하
더군요.
나는 그놈 하고 헤어져 내무반으로 돌아왔
어요. 내무반 청소를 하고 있는데 당번병이 들
어오는 거였어요. 연대장이 나를 호출했다면
서요. 한밤중에 왜 연대장이 나를 호출했을까
무척 의아하더군요.
하여튼 저는 복장을 단정히 하고 당번병을
따라가면서 왜 연대장이 나를 부르는 거냐고
물어 봤죠. 그랬더니 당번병이 잡아온 사내 때
문에 그런다고 하더군요.
당번병은 그 사람을 심령술사라 부르지 않
고 무당이라 부르더군요. 무당이 부대 간부들
앞에서 우리 부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귀신처럼 맞췄대요. 그러면서 아직 살인은 끝
난 게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는 거예요. 장교들은 무당의 말을 믿는 눈치래
요. 그런데 그 작자가 귀신을 두 번이나 목격
했다는 나와 얘기하고 싶다고 해서 나를 부르
는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 사내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을 품고
서 연대장실로 들어갔어요. 연대장실 안에는
저 같은 신병들은 얼굴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
었던 고급 장교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
어요. 맞은편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자칭
심령술사라는 사내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그 여자의 혼
령이 소대장을 살해하거나, 상사에게 해꼬지
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 여자의 혼령은 자기
의 죽음을 알리려고 초소에 몇 번 나타났을 뿐
입니다. 그 여자 역시 살해당했습니다. 그녀의
동생인 소대장처럼 참혹하게 살해당한 거죠.
제 추측이 맞다면, 이 부대 안에 강한 한을
가진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람
은 아닙니다. 하여튼 제 생각에는 그녀의 유령
은 여러분을 놀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
라, 무언가 경고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 같습니
다.”
그 무당은 나를 발견했는지 하던 말을 멈추
었어요. 얼마나 얘기에 열중하고 있었는지 장
교들도 그제서야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렸
어요. 저는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죠.
사실 이 중의 한 사람이 내무반에 나타났다
해도 난리가 날 텐데 까마득한 졸병이 고급 장
교들의 시선을 일제히 받으니 기분이 어떻겠
어요.
한 장교가‘편히 쉬어’하며 짧게 명령을 하
더군요. 그리곤 수염난 사내가 묻는 말에 사실
대로 대답하라는 거였어요.
저는 시선을 심령술사에게 돌렸어요. 덥수
룩한 수염이 전체적으로 얼굴을 덮고 있어서
그런지 거칠고 무식하게 보이더군요. 그런데
그의 눈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생각이 바
뀌더군요. 눈빛은 차분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보였어요.
저는 직감적으로 지식인이라는 걸 느꼈죠.
그는 신이 내려서 점이나 치고 굿이나 하는 그
런 무당 같지는 않았어요. 그들과는 다른 어떤
깊이를 엿볼 수 있었죠.
그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귀신에 대해
서 질문을 던졌어요. 그 귀신과 무슨 대화를
나눴느냐는 둥 그 동안 수없이 받아 본 질문이
었어요. 그는 나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앞질러서 질문을 던지기도 했어요. 나의 이야
기가 대략 끝나자 그는 고급 장교들을 향해 돌
아섰어요.
“역시 그 여자는 희생자예요. 여러분들이 이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고 싶다면 저에게 세 가
지 약속을 해 주셔야 합니다. 결코 무리한 약
속은 아닙니다. 첫째로, 소대장의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세요. 둘째는 이 사건이 의혹이 대
강 풀리면 저를 보내 주세요. 셋째로 이 병사
를 저의 조수로 쓰게 해 주십시오. 저는 사실
여기에 오래 있을 만한 형편이 못 됩니다. 이
병사에게 뒷처리를 하도록 가르쳐 주고 나서
떠나겠습니다. 제가 이 일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제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저는 그 사람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를 끌어
들이는 걸까, 하는 의문도 들었죠.
사실 저는 그 사람이 내건 조건이 마음에 들
지 않았습니다. 일의 뒤처리는 나에게 맡기고
자기는 가겠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속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죠.
연대장을 비롯한 여러 장교들은 즉석에서
그가 내민 조건을 받아들였어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
장이었겠죠.
나는 밖으로 나와서 당번병에게 불만을 털
어놨어요. 그랬더니 당번병이 서울에서 조사
해서 보내 왔다는 팩스를 보여 주더군요.
그 사내의 이름은 임성수, 나이는 서른 둘,
학력은 명문대 철학과 대학원 졸업. 경력 사항
을 봤더니 신문사 문화부 기자를 하다가 한동
안 철학관을 운영했다고 나와 있더군요. 그리
고 그가 철학관을 할 때 드나들었던 손님들 이
름이 적혀 있는데 굉장하더라고요.
나는 그제서야 그 사람 말이라면 왜 장교들
이 꾸벅하는지 알겠더라고요. 나는 팩스를 보
고서 그가 그쪽 계통에 상당한 전문가라는 것
을 알았어요.
저는 다음날부터 그 사람 조수가 되어 그의
뒤를 따라다녔어요. 휴가는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보내 주겠다고 연대장이 직접 약속하더
군요. 저야 그 사람 조수로 일하는 게 싫을 턱
이 없죠. 훈련은 전번 일로 열외되었다고 하지
만 졸따구다 보니까 내무반에 있으면 번거러
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차라리 잘 됐다 싶어 그 사람 뒤를 졸졸 따
라다녔어요. 그런데 제가 잘못했던 것 같아요.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은 정말로 몰랐으니까
요. 그때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 하긴 거절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여하튼 다음날부터 나는 임성수라는 사람과
함께 다녔죠. 그 사람은 마치 형사나 탐정처
럼, 그 여자와 소대장이 시체로 발견된 탄약고
주위를 차근차근 둘러보았어요. 일대를 한 바
퀴 돌고 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저에게 다가
와 그러더군요.
“잊을 건 빨리 잊는 게 좋아요. 우리는 자의
식을 가진 인간이라 해도 자신의 의지대로만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이제는 그만 부모
님을 용서하세요. 사실 우리들은 누구를 미워
하고 용서할 자격도 없어요. 업을 청산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도 부족한 게 인생이니까요.”
전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마치 저의
과거를 모조리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더군요.
내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그는 사방을 휘휘
둘러보더니 초소 위쪽에 자리를 잡고 앉더군
요. 그리곤 결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어요.
저는 그가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
을 점점 확신하게 되었죠. 이번에는 뭘하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해서 그를 관찰하고 있는데
그는 한 삼십 분쯤 지나서 눈을 뜨더군요.
그는 눈을 감은 채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어
요. 그러더니 여자 시체가 누워 있던 주변을
한참 뒤지더니 풀숲에서 검은 덩어리를 집는
거였어요. 제가 보기에는 풀숲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잡풀 뭉치 같더군요. 저는 그래서
저런 시꺼먼 잡풀 뭉치를 갔다가 뭐라려는 걸
까 유심히 보았죠.
그는 잡풀을 조금 떼내서 손가락으로 비비
더군요. 그러자 미세한 먼지가 되어서 허공으
로 날아가는 거였어요. 저는 그제서야 그것이
잡풀 뭉치가 아니라 먼지라는 것을 알았죠. 먼
지는 성인 주먹만한 크기로 덩어리가 져서 동
그랗게 뭉쳐 있더군요.
그는 주머니에서 비닐 봉지를 꺼내 먼지 덩
어리를 넣었어요. 그리곤 그것을 들고 다니 주
변의 먼지와 일일이 비교해 보더군요. 저도 그
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눈으로 확인해 보았지
만 그처럼 검은 먼지는 없었더군요.
주변을 샅샅이 뒤져 구석진 곳에 있는 먼지
와 일일이 대조를 해 봤지만 어디서 날아온 건
지 그런 먼지는 없더군요. 제가 하도 궁금해서
그 먼지가 뭐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 사건과 밀
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대요. 그리더니 손목 시
계를 보더니 연병장으로 급히 향했어요.
어디 가는 거냐고 했더니 상갓집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는 거예요. 과연 연병장 한쪽
에서 짚차가 대기하고 있더군요. 우린 그 짚차
를 타고 엄 중위네 상갓집으로 떠났죠.
초대 연대장이었다는 엄 중위의 할아버지
집은 부대에서 한 사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어
요. 산을 끼고 달리기에 저는 야산에서 은거하
고 있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산굽이를 돌아가자 마을이 나오더군요. 그 마
을은 비교적 산골 마을답지 않게 넓고 깨끗해
요. 도로도 비교적 잘 깔려 있고, 넓은 곡창지
대도 있었죠.
한참 가다 보니 으리으리한 집이 보이던군
요. 저는 서울에서 내노라하는 재벌이 여기다
별장을 지어 놓았나 보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점점 가까이 가 보니 그 집이 바로 상갓집이었
어요. 문 앞에 쭈욱 서 있는 화환을 보고 알았
죠. 화환이 거짓말 아니라 백 개는 족히 넘는
것 같더군요. 국회의원 및 장관, 주변 부대 사
단장 및 각 부대장, 각종 상인 연합체, 무슨 클
럽 등 보낸 사람도 참으로 다양했죠.
열려진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곳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었어요. 파란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
아 놓고 그 위에 간이 천막으로 하늘을 가려
놓았더군요.
조문객들은 민간인들도 많았지만 그 중의
반은 고급 장성이었어요. 최소한 영관급 이상
이었죠.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있는 제가 감히
낄 자리가 아닌 것 같더군요. 우리가 들어서자
한눈에 띄는지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
다봤어요.
“허어, 원성만큼이나 명예가 하늘을 찌르는
구만!”
그런데 임성수 씨는 마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령처럼 묘한 말을 한마디 하더군요. 다른 사
람들이 눈쌀을 찌푸리며 우리를 쳐다보았죠.
그때 안채에서 상주 한 분이 뛰어와 우리에
게 다가갔죠. 우리의 신분을 확인한 뒤에 곧바
로 안채로 우리를 안내했어요.
우린 일단 죽은 희생자 가족에게 조의를 표
한 뒤에 엄 장군이라는 분을 만나러 갔죠. 그
는 퇴역을 한 지 꽤 되었지만 모두들 장군님이
라고 부르더군요.
집을 돌아가니 정자 같은 곳이 보이더군요.
그 옆에 한옥으로 지은 별채가 있었는데 엄 장
군은 그곳에 있었죠.
그곳은 완전 다른 세계더군요. 안채와 정원
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도 물레방아에서 쏟
아지는 물소리, 풀벌레 소리에 섞여 들려 오지
않았죠.
엄 장군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안으
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방 안은 보료가 깔려
있고 아주 정갈했어요. 엄 장군은 열두 자 병
풍 앞에 앉아 한문으로 된 서적을 읽고 있었
죠. 얼핏 보건데 손자병법 같았어요.
그는 안경을 벗고서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
죠. 눈썹이 하얗고 머리카락도 완전 백발이었
죠. 그의 눈에서는 노인의 정기라고는 할 수
없는 형형한 빛이 흘러나왔죠.
임성수 씨와 엄 장군은 차가 나올 때까지 눈
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고 서로 눈을 쳐다보고
있더군요. 마치 질식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어
요. 저는 목안이 간질간질해서 기침을 참느라
고 혼났죠. 마침내 다과상이 나오자 엄 장군이
먼저 입을 열더군요.
“먼 데서 귀인이 오셨는데 대접이 소홀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집안이 어수선해서 그런 거
니 양해하여 주시지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
죠. 하지만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음에도 불구하
고 웬지 우릴 얕잡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초상이라도 치른 뒤에 찾아와야 하는 건데
부대 사정도 워낙 다급해 이렇게 찾아뵙게 되
었습니다. 무례한 질문을 하게 되더라도 양해
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임성수 씨가 머리를 조아리며 충분한 예의
를 갖추어 말했죠. 그의 말투나 행동거지로 보
아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자주 접해 보았
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죠.
“자 차를 드시며 천천히 말씀하시지요.”
엄 장군이 차를 권해 우리는 설록차를 마셨
어요. 상갓집이 아니라 무슨 도 닦는 사람 집
에 방문한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안색을 보아 하니 요즘 통 잠을 못 주무시
는 것 같은데 꿈자리가 몹시 어수선한지요?”
임성수 씨가 찻잔을 들고서 물었죠.
“꿈자리가 어수선한 거야 당연하지 않겠습
니까? 아끼는 손주들이 공비의 손에 무자비하
게 죽임을 당했으니.”
엄 장군의 말은 가시가 돋혀 있는 것 같았어
요. 그는‘공비들 손에’라고 말할 때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군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요근래 혹시 악몽이
나 환영에 자주 시달리지 않는가 해서 물어 보
았습니다.”
엄 장군은 임성수 씨의 말에 움찔 놀라더군
요. 하얀 눈썹이 한번 꿈틀거리더니 다시 노인
특유의 완고한 표정을 찾았죠.
“임 선생이라고 했던가요?”
“네 그렇습니다.”
“이봐요, 임 선생! 나이를 먹으면 잠이 없어
지는 건 당연한 현상 아닌가요? 잠이 엷어지
다 보니 악몽에 시달리는 거고.”
다소 불쾌하다는 듯이 엄 장군이 말했죠. 임
성수 씨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
죠.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모두 악몽에 시달리
는 것은 아닙니다. 젊은이가 꾸는 꿈은 미래에
대한 암시를 품고 있기도 하지만, 노인들이 꾸
는 꿈은 대부분 과거의 반영입니다. 평생을 죄
없이 살아오셨다면 악몽에 시달릴 리가 없죠.”
“그럼, 내가 몹쓸 죄라도 지었단 말이요?”
금세 안색을 바꾸며 엄 장군이 근엄한 얼굴
로 물었죠.
“잘 아시잖습니까? 요즘 들어 그 사람이 꿈
속에 자주 나타나고 있지요?”
“그 사람이라니?”
“다 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손자와 손녀
가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됐다고 생각하
시는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다면 장군
님께서 커다란 실수를 하신 겁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또 다른 사람이 죽
어간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가족들뿐만 아리라 무차별 살
생이 이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막아야
합니다.”
“허어! 난 도대체 뭔 말인 줄 모르겠소!”
엄 장군이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더니 반쯤
돌아앉았죠. 임성수 씨의 얼굴에 언짢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죠. 엄 장군과 임성수 씨는 각자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먼저 임성수 씨
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죠.
“장군님 심정은 이해합니다. 평생을 군인으
로 보낸 장군님이시니 명예롭게 눈을 감고 싶
겠죠. 하지만 가족들이 모조리 죽고 나서 명예
만 남는다면 그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장군님만 혼자 당하고 나면 끝날 것 같지
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서울에 있는 자
제분들이 차례대로 당하게 될 겁니다.”
“음!”
엄 장군은 입을 꼭 다문 채 신음을 내뱉었
죠. 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어요. 임성수 씨
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말했죠.
“모두 다 자업자득입니다. 여태 그 나이 드
시도록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이치 하나 깨우치
지 못했습니까? 인생 헛 사신 겁니다!”
임성수 씨는 뼈 있는 말을 뱉고는 답답해 더
이상 못 있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
죠. 그러자 엄 장군이 당황해서 임성수 씨의
바짓자락을 잡았어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이미 40년
전 일인데?”
엄 장군의 얼굴은 풀어져 있었죠. 더 이상
장군의 위엄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임성수 씨는 노인의 눈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어요. 여전히 불쾌하다는 표
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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