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의 의미

천연소금 작성일 10.11.29 21: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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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나라 3대 임금 성조 영락제 (당태종과 더불어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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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남해원정루트 (이 원정으로 30여개 국가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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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황제의 행렬 (23마리의 백마가 끄는 마차...후덜덜~~)

 

 

 

 

조공(朝貢)하면 흔히‘바치기'를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다. 하지만 조공은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한,중,일 3국

 

학계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사실이다.

 

조공을 무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조공의 반대급부로 회사(回賜),

 

혹은 사여(賜輿)라는 것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받은 쪽에서

 

‘답례로 하사하다’란 의미로 쓴 말인데 이러한 시스템은 중국내부의 황제-제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후가 황제에게 조공을 하면 황제가 그에 대해 회사를

 

했던 전통이,‘중국-외국’관계에까지 확대적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공과 회사사이에 대가관계는 성립했어도 등가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공물량과 회사물량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했으므로 양자사이에 등가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조공무역에서는 어느 한 쪽이 ‘퍼 주기’를 하는 손해

 

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면 어느 쪽이 퍼 주기 외교를 했을까? 힘이 약한 제후국에

 

서 퍼주기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조공무역의 원리는 그렇지 않았다.

 

 

 

 

 

19세기 중후반까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지침서였던 예기 '왕제'편에서는 제후가

 

매년 최소 한 번씩 황제를 예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중용'에서는 '황제

 

의 입장에서 오는 것을 박하게 하고 가는 것을 후하게 하는 것은 제후들을 품는 일'

 

이라고 했다. 주자는 이 표현을 가리켜 '황제가 조공은 적게 받고 회사는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을 했다. 이는 소위 ‘상국’인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

 

비용이며. 제후국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조공에서 ‘퍼 주기’의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긴축재정을 유지한 청나라는 예외) 요즘 말로 하면 중국이 제후국과의 관계에서

 

대체로 무역적자를 보았다는 것인데, 때문에 중국 이웃나라들은 국가적 위신을

 

무릅쓰고 중국에게 더 많이 조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2가지 사례가 있다.

 

 

 

 

 

우선 첫 번째 사례는 1397년 이래 조선-명나라의 무역관계이다.

 

조공무역에 대해 현재의 관점에서는 사대주의라 비판을 하고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지만, 당시 조선에게 있어서 조공은 명분을 주고 이익을 챙기는 실리외교의

 

방편이었다. 이는 조공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선 초 명나라는 3년 1공(貢),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하였다. 조공이 세간의 인식대로

 

명나라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바친 것이라면, 명나라에서 3년에 1번만 바치면

 

된다는데 조선이 1년에 3번 바치겠다고 주장할 까닭이 없다. 양국의 조공횟수에

 

대한 견해차이는 분쟁으로 비화되기까지 했는데 그것은 결국 조공을 하면 할수록

 

중국이 적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분쟁은 1398년에 조선에서 정도전의 자주파

 

정권이 붕괴하고 이방원의 친명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방원 정권이

 

명나라의 대외전략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명나라는 1년에 3차례 조선이 조공무역을

 

하는 데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또한 명나라가 조선에 대한 무역적자폭이

 

대폭 늘어나는 것을 감내하기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명은 조선 초기에는 금과 은을 조공품으로 요구했지만, 나중에는 말과 포로

 

대체하게 했다. 당시 북쪽으로 쫓겨난 몽골족은 호시탐탐 명나라를 칠 기회를

 

노렸는데, 그 때문에 명나라는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말과 포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초기 말은 조공무역의 최대품목이 되었다. 조선 개국(1392)부터

 

세종 10년(1428)가지 36년간 명에 조공한 말, 즉 조선이 명나라에 수출한 말은

 

총 5만 9천여 필이나 되었다. 그런데 실질적인 무역형태를 살펴보면 조공은

 

허울좋은 명목일 뿐이었고, 실상은 조선이 우위에 선 무역이나 다름없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단목지가 자신이 가져온 액수만큼 먼저 말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태종은 말 값을 모두 받은 후에 보내주겠다며 거절하는

 

대목이 나온다. 말 무역은 조선 초 양국의 가장 중요한 조공무역 품목이었지만,

 

실상은 말 값을 한꺼번에 먼저 받고, 말은 나중에 제공하는 형태로 무역이 진행된

 

것이다. 게다가 당시 명나라가 필요로 하는 수요에 비해 말의 공급이 딸렸으므로

 

값도 비쌌다. 태종실록에는 명나라와 조선이 말의 국제무역가를 협의해 포로

 

환산했다는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았다.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

 

승(升)은 삼베의 곱고 거칠은 정도를 표시하는데 1승은 80올로서 오승포는 품질이

 

중등인 삼베이다. 포1필을 쌀로 환산하면 5~6두(斗) 정도였다.(세종 19년 기록)

 

큰 말 상등 값이 오승포 500필이라면 쌀이 250~300두나 되는 대단히 비싼 값이다.

 

조선 말 값은 왜 비쌌을까? 그건 조선서 큰 말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역시 말을 여진족으로부터 수입했다. 당시 여진으로부터 조선이 수입한 말의

 

가격은 다음과 같다.

 

 

"호조에서 상계하기를 '말을 올린 야인(野人: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 하니 이에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8년 1월 7일 -

 

 

면포가 상등품인지, 하등품인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중등품인 오승포가

 

기준이었다고 본다면 조선의 말 수출가는 수입가의 10배가 되는 셈이다.

 

상등면포를 기준으로 대 여진 수입가가 결정되었다고 해도 막대한 이익이 남기는

 

마찬가지였다. 명목상으로는 상국과의 조공무역이었지만, 실질배경은 명-조선-여진

 

세 나라가 조선을 매개로 하는 삼국 무역이었으며 중계자 역할을 맡은 조선은

 

짭잘하게 '남는 장사'를 했던 것이다.

 

 

 

 

 

조공횟수에 있어서도 조선은 거의 일방적인 ‘퍼 받기’를 누렸다. 당시 중국의

 

주변국가들은 중국을 통한 조공무역이 가져다 주는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는 노력에

 

필사적이었다.

 

(오키나와의 경우, 조공무역의 이익을 통해 독립왕국을 세울 수 있었을 정도였다.)

 

때문에 주변국들은 시도 때도 없이 중국을 찾아가서 충성을 서약하고 回賜의

 

혜택을 누리려고 했다. 명대의 중국이 경제적인 번영에서 역사상 최대정점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한 두번도 아니고 수시로 계속 찾아오는 충성서약의 행렬에는

 

적잖은 경제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각국의 조공 횟수를

 

'대명회전'이라는 법전에 아예 명문으로 규정해 놓기에 이르렀는데, 이에 따르면

 

유구(오키나와)는 2년에 1회, 베트남,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

 

조공을 할 수 있었다. 조공횟수 제한이 구체화된 방안은 ‘감합’이라는 일종의

 

증표 발급이었는데 이를 가진 사신단만 방문과 무역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400년부터 1년에 3회를 하다가 1534년부터는 1년에 4회,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의 정기적인 사행조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사은(謝恩), 주청(奏請), 진하(進賀), 진위(陳慰),

 

진향(進香), 압마(押馬), 주문(奏聞) 등의 임시사행까지 감안한다면 명나라는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한 무역특혜를 부여한 셈이다.

 

 

 

 

 

조공무역에 관련해, 명이 조선에 베푼 특혜와 반대되는 또 다른 사례는 1551년

 

명나라-일본 무역단절이다. 1404년 이래로 명나라와 무역관계를 개설한 일본은

 

'10년 1회 조공'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어떤 때는 8년 만에 찾아가기도

 

하고, 정 눈치가 보이면 10년에 1번 가기는 하되 조공 물량을 규정보다 늘리는

 

편법을 발휘했다. 일본의 이런 행태에 대해 명나라는 강력한 항의를 하는 등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그럼에도 일본의 태도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명나라는 1547년 복건성 영파에 도착한 일본 조공선박을

 

10개월씩이나 묶어두기도 했다. 그런 방법으로 일본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1551년에는 아예 대일 무역관계를 전면적으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결국 그로부터 41년 뒤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도입명'이라

 

는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조공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고...*^^*

 

 

 

 

 

 

 

조공무역이 자국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쳤는데도 중국이 조공무역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한 것은, 그것이 자국의 안보는 물론이요 동아시아 패권에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미국이 적자외교를 통해

 

한국 등 위성국에게 패권을 행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중국 역시 기본적으로

 

퍼 주기 외교를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외교전략은 크게

 

보면 중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작게 보면 중국이 이웃나라들의 침공으로

 

부터 안보를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당시 동아시아의 '악의 축'들인

 

흉노, 돌궐, 여진의 위협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퍼 주지 않았다면 한족과 한족의 나라 중국은 진작 멸절되었을지 모른다. 한때

 

'큰 손'이던 미국이 '짠돌이'로 바뀌면서 미국의 패권행사에 대한 세계적인

 

거부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이 '베푸는'외교를 지향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사방의 적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중국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자신을 보호했던 것이다.

 

 

 

국제관계건 국내관계건 혹은 개인이건 조직이건 간에, 남에게 돈을 쓰는 쪽은

 

대개 다 남을 이끄는 쪽이디. 돈을 안 쓰는 쪽이 리더가 되기는 힘들다.

 

자기 수중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와야만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남의 리드를 받는 쪽이 속은 편할 수도 있다. 돈 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남에게 돈을 쓰는 쪽이 실상은 돈을 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의 조공을 받은 동진의 황제 효무제는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희사를 했다. 백제에 대한 그 같은

 

'퍼 주기'를 통해 효무제는 북중국을 견제하는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관계를 통해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었지만 백제가 얻은 이익은

 

동진이 얻은 이익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또 조선에게 무역특혜를 부여하는

 

대가로 명나라는 툭 하면 여진족 토벌을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곤 했다.

 

조선에 돈을 쓰는 대신 조선군대를 자기 수족처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역대왕조들은 조공무역을 통해 무역흑자를 챙기는 데에만 주력했지, 그것을

 

통해 중국이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에 대해 별로 고민하는 기색이 없었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왕조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동아시아 패권을 행사할 만할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민족의 왕조들은 대중국 조공외교를 통해 무역흑자를 얻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 관계를 통해 더 큰 이익을 얻은 쪽은 한민족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퍼 주기'와 한민족의 '퍼 받기'는 세월이 지속되면서

 

한민족이 중국의 영향권에 예속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물론 한민족도 여진이나 대마도, 일본 등을 상대로 퍼 주기 외교를 한 적이 있다.

 

조선 초 신숙주가 주도한 '베푸는 외교'를 통해 대마도, 일본을 조선의 영향권

 

하에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왜구 피해를 방지한 경험이 있다. 신숙주의

 

퇴진 후 조선이 왜구 피해에 크게 노출되고 조선의 바다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사실은 '퍼 주기'외교가 실제로는 '돈 버는'외교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마도, 일본에 '퍼 주기'를 하는 데에 들어 간 비용보다 왜구에게 피해를 입고,

 

그들을 단속하는 데 투입된 비용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한민족은 '베푸는'외교를 통해

 

자국 안보를 유지하고 역내 패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러기에는 지난날 한민족의 삶이 너무 각박하고 고단했었다.

 

 

 

 

이제 한국은 G20의 중요국가이다. 이런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정치적으로도 도약을 하려면, 과감히 베풀 줄 아는 면모를 보여야 한다.

 

부모자식간에도 돈을 쓰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살벌한 국제관계에서

 

돈을 쓰지 않고서 어떻게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이 점점 인색해지자 미국을 대하는 국제사회의 태도도 차차 냉랭해지고 있다.

 

그에 따른 미국의 입지도 계속 좁아지고 있다. 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은

 

가능한 최대범위 안에서 남에게 더 많이 베풀고 세상의 인심을 얻는 길이다.

 

남에게 빼앗기고 굶주렸던 참혹한 지난 날을 잊지는 말되, 그런 기억이 우리의

 

민족성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장기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의 지위를 높이고, 단기적으로는 국가안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막연하게 조공은 소위 '상국'인 중국이 '삥뜯어가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조선은 빵셔틀...?)조공에 대한 공부를 우연히 할 기회가 생겨...

 

몰랐던 사실들을 여러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조공무역이 어떤 것인지 알고난 후 제가 느낀 점이라면...

 

1. 조공무역은 단물이 많은 장사였다는 점.

 

2. 조선이 무조건 굴욕적으로 '조공'을 강요당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

  

   (공녀차출같은 부분도 분명 있기는 하지만...)

 

3. 중국의 조공무역은 주변국들에게 '중화사상'을 세뇌시키고, 중국영향권에의

   

    예속을 강화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 외교술이었다는 점.

 

4.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점.

 

 

어떻게 보면 지금 중국넘들이 북한을 감싸고 도는 것도 옛날 조공관계의 연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하지만 대한민국의 국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과거 중국의 경우를 벤칭마킹할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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