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 장군 백선엽 간단 이력

낙동강대구 작성일 20.07.18 13:5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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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ㅣㅊㅣㄴㄴㅗㅁ들이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긴 했지만,

독립군을 상대로 싸운게 아니라 팔로군을 상대로 싸웠으니 민족반역자로 

볼 수 없다는 미친 멍멍소리를 시전하고 있길래 여기서 다시 정리해봄.

 

1.

백선엽의 창씨개명명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側)는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죽인

바로 그 군인으로, 식민지시절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일본의 군인영웅.

백선엽이 우연의 일치로 지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님.

 

2.

백선엽은 1943년 간도특설대로 자원하여 전근하였는데,

그는 간도특설대의 설립목적과 활동을 확실히 알고 자원한 것임.

자신이 조선독립군과 조선독립을 지원하는 양민들을 상대로 싸울것임을 잘 알고 있었음.

당시 자유사변등으로 대규모 무장 조선인 항일독립군대는 많이 축소되긴 했지만,

소규모 조직으로 또는 동북항일연군소속으로 많이 활동하고 있었음. 

 즉, 빨치산을 토벌하면서 함께 조선항일독립군도 함께 토벌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음.

 

위키미디어 간도특설대 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간도특설대

 

간도특설대는 간도(間島)에서 반일-반만주국 투쟁(대표적인 조직은 중국 공산당휘하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으로 곤경에 빠진 만주국-일본 당국에 의해 설립되었다. 만주국(滿洲國)의 참의원을 지낸 이범익이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다스려야 한다'며 설립하여 대대장 등 몇몇 직위를 제외하고 조선인으로 채워졌다. 명칭도 이에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아닌 만주국군에 소속되었다.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다수의 항일조직은 군대, 관헌 등의 단속과 집단주거 마을건설에 의해 주민과 격리된채 은신하면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맞서 간도 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년에서 1943년까지는 만주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동북항일연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1944년과 1945년에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과 전투를 수행하였다.


3.

백선엽은 살아생전 자신의 간도특설대 근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음.

간도특설대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음. 일본군 입장에서 아무 조선인이나 징발해 같은 조선인을 토벌 시키려다가 반란이라도 나면 더 큰일나기 때문에, 지원자에 한해서 철저히 사상검증 및 같은 민족을 아무렇지 않게 토벌할 수 있는 인물들로 선별해서 만주군 소속으로 만든 부대임. 

900명 정도의 소수정예. 종전후 일본인들 입장에선 일본군도 아닌 만주군이었고 일본인의 부대도 아니었기 때문에 관심도 없었음. 따라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아는 일본인은 극소수. 

그런데 백선엽이 일본에서 자서전도 쓰고 강연도 많이 다니면서 간도특설대에 대해 자랑스럽게 강연도 많이하고 다니니, 일본인 입장에선 이보다 더 사랑스런 조선인이 없었고, 백선엽의 노력으로  이제는 웬만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 잘 알게 됐음.  

 

“백선엽, 日서 ‘간도특설대 강연’, 영웅대접…기록 다 있다”

[출처1: 고발뉴스닷컴]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43

[출처2: 띥;usa] https://www.ddanziusa.com/news/articleView.html?idxno=4523

박 장군은 이날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해방후 박정희 정권 때 일본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 강연, 기자회견을 하고 회고록을 냈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백 장군이 스스로 간도특설대 문제를 부각시켰다며 “일본 사람들에게 명예롭게 임무를 수행했다고 녹음까지 한 것을 내가 입수했다”고 강조했다. 

박경석 장군은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친일파와 독립군 장교를 연구했으며 6.25 때 만들어진 ‘가짜 영웅’에 대해 조사해왔다. 특히 백선엽 장군의 숨은 행적을 추적해왔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만든 소규모 특별 조직으로 일본군 출신이지만 애국적인 생각을 가진 장군들의 제보로 알게 됐다고 한다. 

박 장군은 “일본 군국주의가 연변에 있는 조선 독립군, 독립운동가를 소탕하기 위해 만든 특별 조직”이라며 “천명 이내 보병대대 수준이었다”고 했다.

박 장군은 “부대장, 참모장이 일본군이고 그 밑의 소대장, 소대원 등 모든 부서는 조선인”이라며 “백선엽 소위, 중위가 근무 했다”고 밝혔다. 

친일파들을 연구하는 중에 “이형근 장군, 이한림 장군이 ‘우리가 일본 군대 생활을 어쩔 수 없이 했지만 간도특설대만은 용서받을 수 없다.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한번 조사하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그는 “그래서 ‘기왕 연구하는 김에 확실히 해야겠다’고 해서 일본도 가고 만주도 가면서 확실한 근거를 수집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박정희 정권 당시 백 장군의 일본 내 활동을 알게 된 것. 박 장군은 “일본 사람들게 큰 호응을 받았다, 영웅으로 추켜세웠다”고 말했다. 

그는 “백선엽 자신이 조선독립군을 소탕한 것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얘기를 일본에서 했다”며 “회고록을 비롯해 많은 저서, 기자회견, 연설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4.

백선엽은 제주4.3사태 때 같은 동족을 죽일수 없다는 여수14연대의 여수순천반란사건을 진압했는데, 동생 백인엽과 함께 반란사건과 무관한 양민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임의로 학살했음. 즉, 백선엽과 백인엽 형제의 의식속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민족/동포개념은 없었고,

한국인은 그저 아무렇게나 죽여도 되는 떼껄룩 쯤으로 여겼음. 

(특히 백인엽의 양민과 부하에 대한 즉결 처형방식은 유명함. 나무위키 백인엽 항목을 읽어보기 바람.)

1952년 빨치산 소탕작전에선 양민을 거의 학살하지 않았는데, 당시 김성수 부통령이 직접 양민을 학살하지 말아달라는 편지를 백선엽에게 보냈기 때문.  

 

5.

한국군의 근간이 되는 4대파벌은 독립군(광복군계), 중국군(국민당군계), 만주군, 일본군(일본육사) 출신들인데, 

이중 남한군대에서는 만주군출신들이 많은 두각을 나타냈음.

그 이유는 초기한국군대는 미국 군사고문단에 상당히 의존하는 구조였기 때문임.

 

독립군, 중국군, 일본육사출신들은 이전에는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한국군에게 사사건건 간섭하는 미군사고문과 사이가 안좋았음. 때문에 창군초기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때도 많은 공적을 세우고도 미국 군사고문과 사이가 안좋아 교체된 군인들이 많았음.    

 

반면 만주군의 경우 대부분 일본군사고문이 지도하는 체제로 운영되는 부대였기 때문에,

군사고문을 다루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음. 또한 만주군 출신들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출세지향적인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데 열심이었던 반면, 다른 군 출신들은 영어학습에 별로 관심없었음. 자연히 미군사고문들과 소통도 잘되고 그들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는 만주군 출신들이 군의 요직을 독차지하게 됨.

 

※ 일본육사출신들의 경우는 만주군출신들과는 다르게 주로 남방전선에서 근무하였고, 

    일본육사를 나와 독립운동한 지청천, 김경석등에 대해 열등한 감정을 가지고 있기도 했음.

    많은 일본육사출신들은 해방후 자신들이 일본군에 근무했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줬음. (일부 ㄸㅗㄹㅏㅇㅣ들이 북한군대도 친일파를 중용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일본육사출신들에 한함. 만주군 출신들은 모두 처단대상이었음.)  

    만주군 출신들의 경우에는 주요전장이 만주였던 만큼 자신들의 상대가 중국국과 조선항일독립

   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식민지시민으로서 고속출세하기 위해 자원입대한 경우가

    많았음. 이들에게 일반 조선인은 그냥 하급 식민시민이고 벌레였음.

    해방이후에도 자신들의 입신양명을 위해 서로 뭉치고 도와주며 오로지 출세만을 지향

    했고 힘을 합쳐 과거세탁 함.

    한국전쟁당시 만주군 출신들이 용감하게 싸운것은 인정하나, 

    어차피 적화통일되면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입장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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