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ㅆㄹㄱ 라고???

짱공이시다 작성일 12.08.20 23:24:06
댓글 9조회 3,997추천 9
 명성황후 시해 낭인의 단순행패가 아니었다     -()가 국가차원에서 저지른 범죄행위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왠만큼 안다고 하는 지식인들조차 의외로 대한제국의 참모습과 서구열강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와 왜나라의 간섭과 침탈로부터 벗어나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유지하려고 애를 태웠던 광무황제(묘호 고종)와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왜곡된 정보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는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근대적 연구와 해석작업이 왜의 식민사학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불행한 사건에서 비롯된 결과로서어떻게 해서든지 대한제국 병탄을 합리화하는 한편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조선인은 반도근성을 지닌 저열한 민족이니 개조(改造)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도록이른바 황국신민화 교육을 통해 주입-확산시켰던 왜놈들의 역사 왜곡 교육을우리가 국권을 회복하고 신생 대한민국을 출범시켰어도 바로잡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정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대한제국의 명성황후라는 제대로 된 호칭조차 부를 줄 모르고 “조선의 민비”라고 부르면서, 그 여자가 나라를 말아먹은 형편없는 왕비였고, 끝내는 일본 낭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라고 단정적으로 흔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이러한 무지(無知) 왜의 식민사학자들이 흉계로 역사를 조작하고 의도적으로 해석을 왜곡한 거짓에서 비롯되었음을 최근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왜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이 명성황후 시해 전말을 철저하게 감췄고, 광복 후에도 우리나라의 학자들 황후 시해의 진실을 파헤치는 연구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사시간에 명성황후의 해자는 왜의 사무라이 떨거지인 낭인(浪人)“ 이라고 배웠다.이는 민간인들이 저지른 일로, 당시 일본정부와는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영수 연구위원이 러시아의 모스코바 국립대학에서 연구하며 집필한, “명성황후를 시해한 자는 당시 조선 주재 일본영사관 순사 와타나베”라고 분명하게 밝힌 연구서 <미쩰의 시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를 출간함으로써광복 이후로도 식민사관 맹종자들이 안주해 왔던 국사학계에 큰 파랑을 일으키고 있다.1450FA354FD76503246957김영수 연구위원은 이 책의 서문에서 “한일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하려면, 일본정부의 사과로 시작되는 과거사 청산이 필요하고, 사과의 첫 번째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판단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을미사변 당시 주한러시아공사였던 베베르와 당시 사건을 목격한 스위스계 러시아인 세르빈 사바찐이 15분 단위로 상황을 파악한 자료, 그 밖 러시아 외교문서 한국 관련자료들을 찾아낸 경위와 그 내용을 공개했다.“그동안 국내외 학계는 을미사변과 관련해 일본의 자료에만 의존했을 뿐가장 핵심자료인 러시아의 외교문서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 자체에 대한 완벽한 복원을 할 수 없었다 고 주장하는 그는, “당시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가 1895년 10월 9일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에게 보낸 을미사변에 관한 장문의 보고서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 중인 이 보고서는 15장 분량의 본문, 현장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11개의 부록, 상세한 경복궁 지도 등으로 당시 주한 외국공사의 보고서 중 가장 상세하게 을미사변을 기록했다.시해현장 목격자인 세르빈 사바찐은 1880년 초 한국 해관의 관리 명단에 올라 있던 사람으로,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광무황제를 보호하는 외국인 대궐수비대로 근무했다.
현재까지 명성황후 시해장소 및 암살자는 사료마다 제각기 다르게 말하고 있다. 1896년 4월에 작성한 궁내부의 <8월 사변보고서>에 따르면 “그 자객(刺客)이 각방(各房)에 심멱(尋?)하더니, 필경에 왕후폐하를 초심(稍?)한 방에 피하시려는 처(處)에서 심출(尋出)하여 도인(刀刃)으로 작하(斫下)였는데, 당상에는 피살(被殺)하신 줄은 정영(丁寧)치 못하였으나”라고 하였다. 또 1897년 11월에 작성한 <명성황후의 행록行錄>에는 “곤령전 합문(閤門, 곤령합 건물안 출입문)에서 묘시(卯時, 새벽 5~7시)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돼 있다.당시 주한미국공사대리였던 앨런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일본인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고 미국정부에 보고했고,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는 “왕비는 복도 아래로 달렸지만, 추적당해 쓰러졌다. 그녀의 암살자는 그녀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그의 칼로 그녀를 찔렀다.”고 영국정부에 보고했다. 주한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고 러시아 정부에보고했다.김영수 연구위원은 이러한 당시 주한 외교관의 기록 중 ‘복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곤령합과 정시합에서 복도라고 불릴 만한 장소는 건청궁과 연결되는 ‘복도’가 유일하다. 따라서 왜놈 자객이 건청궁에 침입하자 정시합에 머물던 황후는 궁녀 복장으로 위장하고 곤령합 침실로 세 사람의 궁녀와 함께 숨어 있다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건청궁 복도로 도망치다가 살해당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영국공사관과 러시아 쪽 외교문서를 확인한 김 연구위원은, “명성황후 시해범은 일본 낭인이 아니라 분명 일본 공사관의 순사 와타나베 다카지로였다” 고 밝힘으로써일본제국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다지금까지 일본정부는 황후 시해는 한낱 시정 무뢰배들의 폭거일 뿐이라고 하면서 일본정부 차원으로 책임질 일은 없다고 주장해왔다.20만 명이 넘는 조선의 젊은 여인들을 ‘정신대‘ 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고가 왜놈 군인들의 성노리개로 만든 일을 극구 부인하고, 백만이 넘는 징용피해자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본정부이기에 이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지만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을 철저히 따지고 물어야한다

김영수 연구위원은 이 책의 제목을 <미쩰의 시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이라고 지었다그 뜻이 깊다. 러시아 작가 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미쩰’ 곧 눈보라로 묘사했다고 한다. 김 연구위원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보라가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시절은 운명과 우연을 넘나들며 촛불처럼 타오르는 사람들의 어둠과 희망의 시기였다.”라고 책의 마지막에서 토로했다.203245364FD69A31240D4A책이 출간된 후 그는, 직접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책은 명성황후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도 식민사관 영향을 받았는지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는데, 어떻게 보나?“ 라는 한 취재기자의 잘문에 대해, “명성황후는 부정적인 시각과 달리 당시의 외교문헌들을 뒤지면 명석한 두뇌, 신중한 성격, 본능적인 직감 등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후는 기억력도 비상했고, 독서를 즐겼으며, 결단성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 행록을 살펴보면 ‘글을 배울 때는 두세 번만 읽으면 암송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의 정사에 대한 옳고 그른 것을 마치 손바닥 보듯이 알았다.’‘소학?? 효경(孝經)? 여훈(女訓) 등을 읽느라 밤이 깊도록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있다. 고 대답했다.
심지어 고종은 ‘사변에 대처하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이 모두 들어맞았다.’라며 강한 신뢰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명성황후는 일제의 조선병탄 흉계에 대항할 가장 확실한 존재였고왜놈들 쪽에서 보면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제거대상이 되었을 것이다.그동안 일제의 역사조작에 놀아나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보아온 어리석음은 이제 청산되어야만 마땅하지 않겠는가 


미쩰의 시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에서는 명성황후가 정치를 잘 했느냐 못했느냐의 시비를 가리기 위해 쓴 책이 아니라,  일본정부가 주장한대로 "조선의 민비가 왜의 사무라이 떨거지인 불한당에게 살해 당한 사변"이 아니라, 왜의 침략야욕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 꿰뚫어보고 그에 대비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왜의 국가권력인 주한일본영사관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국제범죄행위"임을 증명하고자 한 책입니다. 
당시 대한제국 백성들이 명성황후를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보았다면,  백범 김구 주석같은 사리분별이 분명한 어른이 나루터에서 국모시해범으로 의심되는 왜놈장교를 척살하고 살인범이 되고 사형을 언도 받았겠습니까 ? 

애국충정과 나라의 미래를 거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는 <백범일지>만 읽어보아도 당시의 우국지사들이 황후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글에서 제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성황후가 총명했다느니 정치를 잘했다느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는 일본제국의 공권력에 의해 시해됐다는 고발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국제외교문서자료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말입니다.
명성황후를 논하려면 우선 <갑신정변>을 전후한 시기의 <황후와 개화파 신료들인 김옥균-박영효 등이 어전에서 나눈 대화와 나라 걱정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놈들의 침략야욕을 젊은 개화파 신료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에, 김옥균 등 정변의 주역들이 황제 황후를 옹립하는 친위정변을 일으켰지만, 그들이 왜의 후원에 의지하고 있음을 간파한 황후가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일제의 조선병탄 흉계에 대항할 가장 확실한 존재였고, 왜놈들 쪽에서 보면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제거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술국치를 전후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의 봉기와 우국지사들의 순절, 황후의 시해와 황제의 국권회복을 위한국내외적인  뼈아픈 노력,  그리고 연이어 일어난 항일투쟁과 기미독립민세행진 등이 있었는데도 이를  두고 "대한제국이 수치스럽게 패망했다"고 주저없이 말할수 있을까 ?  

 "김옥균-박영효가 친일 급진 개화파인 것이나 일본의 후원을 받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이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갑신정변 당시에는 공공연한 사실이 아니었고, 뒷날 역사로 기록될 때에 그렇게 평가된 것이다.  사실상 김옥균 등 개화파 신료들은 일본을 이용하여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도약시키고자 하는 욕심만 있었을 뿐이지 일본의 이익을 위한 앞잡이는 아니었기에, 일본의 조선병탄 야욕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명성황후는 젊은 개화파 신료들이 모르는 왜놈의 야욕을 내다보고 있었음이 갑신정변 당시 황후와 개화파 신료들이 주고 받은 대화내용에 담겨 있다.

1. 명성황후는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한 흥선대원군의 선택이다???

 

명성황후와 관련된 글들을 보면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기 때문에 세도정치를 견제하기위해서 흥선대원군이 직접 간택했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를 보면 명성황후는 미천한 가문의 출신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명성황후가 태어난 곳은 ‘감고당’이며, 이곳은 숙종이 장인인 민유중(인현왕후의 부친)에게 직접 하사한 가택입니다. 명성황후는 민유중의 직계후손으로 가계도는 아래와 같습니다.

 

(실제 숙종이 하사한 가택은 가히 대궐만한 규모를 자랑하였고, ‘감고당’은 이 대궐만한 가택에 위치한 하나의 별채정도였다고 하지요. 현재 ‘감고당’은 그 형태가 남아있습니다.)

 

여양부원군 민유중 -> 정1품 영의정 민진후 -> 정2품 이조판서 민익수 -> 정2품 대사성 민백분 -> 종2품 개성유수 민기현 -> 정3품 첨정 민치록 -> 명성황후

 

이처럼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으로부터 명성황후의 부친인 민치록에 이르기까지 직계로 이어져있으며, 정3품 이상의 당상관만을 역임한 집안입니다. 이런 집안이 미천하다면, 과연 어떤 집안이 명문가이고, 훌륭한 집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집안의 내력은 그렇다고 해도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무남독녀였습니다. 훌륭한 가문의 무남독녀라면 분명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 가문에 세도정치의 씨앗을 심은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자신입니다. 대원군은 민치록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자신의 처남인 민승호를 양자로 입적시키게 됩니다. 결국은 명성황후의 왕비간택이 있기 전부터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간에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고, 흥선대원군이 직접 자신의 처남을 민치록의 양자로 입적시켜, 명성황후가 자신의 처남의 누이동생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 명성황후의 부친 민치록과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간에는 어느정도 왕래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과정에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안면도 어느정도 있었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이는 왕후의 외척이 자신의 사람(민승호, 흥선대원군의 처남이자 명성황후의 양 오라버니)이니 자신의 내척 겸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대로 정3품 이상의 고관직을 역임한 집안에 자신의 사람(민승호를 양자로 입적)을 심어놓으므로 인해 그 집안의 세력을 통째로 흡수하게 되지요. 실제 5대에 걸쳐서 고관직을 역임하고 왕후(인현왕후)까지 배출한 가문의 세력과 재산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러한 세력과 부를 자신의 처남에게 양도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명성황후가 미천한 출신의 고아이기 때문에 왕비로 간택된 것이 아니라 명망 있는 권세가의 출신이며, 흥선대원군 자신의 이득과 결탁할 수 있는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직접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명성황후가 미천한 출신의 고아라고 알려진 것은 명성황후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은혜를 입고 왕비가 되었으나 끝내 다신의 은인에게 등을 돌려 권력다툼 및 갈등을 유발했다는 모든 책임을 명성황후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며, 소위 인생역전을 통해 권력을 탐하였다는 것을 더욱 더 부정적으로 비추기 위한 역사적 왜곡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오히려 흥선대원군이 민치록 가문의 가세와 부를 이용하기 위해서 명성황후에게 외척을 만들어준 것이고, 자신의 세력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명성황후를 왕비로 간택했다는 것이 맞습니다.

 

2. 고종은 무능한 왕이며, 명성황후는 외척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우리가 가장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바로 고종이 무능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부분입니다. 고종이 무능한 왕으로 전락하면서 일제의 침탈이 고종의 무능함과 명성황후의 사리사욕에 의한 원인으로 돌리려는 계략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는 고종은 뒷전으로 물러나있고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쟁탈에 의해서 조선이 망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황제에 의한 권력쟁탈이 맞습니다.

 

실제 고종은 개혁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로서 이러한 내용은 실제 기록으로도 많이 전해집니다. 고종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대항으로 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방책으로 외세를 이용하는 이이제이를 펼치게 됩니다. 하지만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 명성황후라는 잘못된 인식이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외세를 끌어들이는 정책이 명성황후의 판단이라면, 고종은 그야말로 무능한 왕이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 작용하게 되지요. 하지만 고종이 무능한 왕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면, 명성황후의 외세론이 완전히 부정되는 결과를 낳게되지요.

 

더불어 명성황후의 외척, 그리고 외척의 부정부패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다는 주장이 굉장히 많은데, 과연 여흥민씨 세력을 명성황후의 외척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실제 여흥민씨 세력의 핵심인물로 있었던 민태호, 민겸호, 민영환, 민영익 등의 인물들은 명성황후와 11촌이 넘는 인물들입니다. 반면 고종황제와는 삼촌, 사촌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며 실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은 고종황제의 사촌동생이 됩니다. 다만 같은 여흥민씨라서 명성황후와 여흥민씨 세력을 결부시키는 주장이 발생하는 것인데, 이 또한 고종이 무능한 왕이며, 명성황후가 국정에 간섭했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빗어진 왜곡이지요. 실제 고종이 국정을 주도했으며, 자신의 측근인 여흥민씨 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을 유지하는 세력기반으로 이용했다는 점이 맞습니다. 명성황후와는 전혀 무관한 세력이지요.

결과적으로 여흥민씨 세력은 명성황후의 외척세력이기보다는 고종황제의 내척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때문에 여흥민씨 세력의 부정부패를 명성황후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애초에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억지라고 생각됩니다.

 

고종이 무능한 왕이 아니라면, 자신의 부인과 외척세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눈감고만 있지는 않았겠지요. 고종이 직접 발탁하여 고관직을 준 상태라면, 자신의 핵심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여흥민씨세력의 부정부패를 어느정도 눈감아줄 수는 있는 상황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명성황후 암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본낭인이 아니라 일본의 수뇌부 지식인 계층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때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서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시해라는 것은 '신하가 왕을 죽였을 때' 사용하는 용어로, 정상적으로 사용되려면 ‘암살’ 및 ‘살해’가 맞습니다. 을미사변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기록한 것은 일본이 개입하지 않고 조선인에 의해서 발발한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요.

을미사변은 일본에 의한 ‘명성황후 암살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더불어 사건에 참여한 인물들이 낭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낭인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직업이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 을미사변에 참가했던 인물들은 일본 고위층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시해에 참가했던 인물들이 그 후 일본의 정국을 주도하고,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는 을미사변에 일본이 직접 개입을 했으며, 상징적인 의미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는 점을 은닉하기 이한 역사왜곡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일본의 고위층 지식인들이 직접 을미사변에 관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상징적인 부분에서 해석한다면 ‘남존여비’사상이 풍비한 일본 사회에서 조선의 침략이 국왕이 아닌 왕비에 의해서 빈번히 실패하자 일본의 수뇌부 및 사회지도층의 자존심이 크게 추락했다는 가정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을 침략하는데 있어서 명성황후의 살해는 필연적이었고, 그 동안 받은 수모를 갚기 위한 방법으로 수뇌부의 지식인들이 직접 참여했다는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가정이 옳다면 이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지요. 일본의 낭인에 의해서 살해된 것과 일본의 수뇌부를 담당하는 지식인들에 의해서 살해된 것은 그 의미부터가 달라집니다.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당시 일본의 내상과 외상을 역임한 정치 실세로 이토우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의 정계를 움직인 자
--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시해 사건 성공 이후 일본 정치계의 거두로 큰 영향력을 행사함.

--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겐조는 구 한말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사의 사장이다. 한성신보사는 창립기금에서부터 모든 운영비를 일본공사관에서 지원했던 일본국가 소유 신문사이다. 한반도에 기자로 위장한 자들을 들어와서 조선정세에 대한 염탐과 정보수집을 한 기관이다. 그리고 한성신보는 우리 민족의 수탈과 민족 정신을 파헤치는 친일언론의 심장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 책임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낭인들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행동 지침을 하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겐조는 구마모토(熊本)출신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행동대들은 대부분 구마모토 출신들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 성공으로 후일 체신상과 내상(지금의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 호리구치 구마이치(掘口九萬二)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한 자로서 사건 후 브라질 전권공사를 역임함.
-- 시바 시로우(柴四朗)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칭 엘리트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작전 참모 역할을 한 자이다. 시바 시로우는 그 후 일본에서 정치 소설가로 더 큰 명성을 얻게 되며 1898년 중의원에 당선된 뒤 10선 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부류가 낭인으로만 알고 있었지요.

 

이처럼 명성황후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들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는 많이 다릅니다. 또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점도 상당히 많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3가지는 실제 정확한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제시하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지금은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를 하기보다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적 진실이 밝혀진다면, 역사적 재조명과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밝혀지지 않을까요?



134547291859662.jpg

134547221312269.jpg
(명성황후를 시해한 칼을 기념해서 간직까지 하고 있는 정신나간 니뽕 그만큼 명성황후가 두려웠던 것인가)
문화재제자리찾기(사무총장 혜문스님)가 안중근 장군 순국 100주년을 맞아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히젠도(肥前刀)'를 환수하기위해 26일 오후 1시에 조계종 중앙신도회 전법회관에서 환수위 출범식 열고 본격 환수 운동에 나선다.

환수위는 출범과 동시에 히젠도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쿠시다 신사'에 환수요청서를 보내기로 했다.

환수위는 요청서에서 "히젠도는 1895년의 조선왕비 살해사건으로 이른바 ‘피로써 피를 씻은 한일관계’가 시작 된 비극적인 업보를 상징하는 물건"이라며 "이는 한국은 물론 일본 역사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었으며, 우호적 한일관계를 토대로 열어가야 할 새로운 시대를 가로막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당시 명성황후 살해사건으로 전국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나고 김구선생도 이에 격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안중근 장군 역시 하얼빈에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이토오의 15개 죄목에서 ‘남의 나라 왕비를 살해한 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며 "1965년 12월 3일 일본 국회 참의원의 일한조약특별위원회(日韓?約等特別委員?)에서도 당시 공명당 소속 '쿠로 야나기' 의원(?柳明)이 사토 총리에게 “ 한국독립운동의 선두에 왕비 살해사건이 있다(?立運動の先頭に立った韓?の王妃を殺害していると) ”고 지적한바 있다고 밝혔다.

이어 "쿠시다 신사가 보관하고 있는 히젠도는 명성황후를 직접 살해한 '토오 가쯔아키(藤勝顯)'가 명치 41년(1908) 기증한 것으로 이는 칼의 봉납기록(奉納記錄)에 “조선왕비를 이칼로 베었다‘란 구절이 써져있고 나무로 만든 칼집에도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고 새겨져 진 것만 보아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세계 역사상 타국의 왕 혹은 왕비를 살해한 물건이 현재 보관되어 있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다"고 밝힌 환수위는 "근대 법치국가의 성립이후 살인에 사용된 흉기가 해당검찰이나 국가에 압수되지 않고 개인 혹은 단체에 남아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고. 게다가 비극적인 한일역사의 한 장면을 그대로 담고 있는 칼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며 "일본의 조선강점 100년을 맞는 해이자 안중근의 사망 100년을 맞는 해인 올해에 한.일간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는 중대한 시점에서 히젠도를 좀 더 바람직한 방법으로 처분해 주기를 제안한다"며 인도를 요구했다.

2006년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을 하면서 자료를 조사하러 일본에 갔다가 이 칼의 존재를 알게 돼 쿠시다 신사에 들러 칼과 칼집, 봉납기록을 확인한바 있는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스님은 "국모살해의 죄를 물어 안중근 장군이 의거를 감행하고 순국한지 100년을 맞아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죄도구가 국가가 아닌 신사에 보관 돼 있다는 것은 명성황후와 안 장군의 영령도 바라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일들이 정리 되지 않고는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가 정립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환수운동 위원장은 최봉태 변호사와 혜문스님이, 기획위원은 이종우 문화재제자리찾기 실행위원과 이용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보향 불교여성개발원 이사가 각각 맡았다.


134547225419434.jpg
(시해의 주동자이자 일본의 깡패대장, 군인 미우라 고로의 만년모습)

 

      

미우라 고로 '황후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좀처럼 빈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번번히 단지 여자 한명인, 명성황후에 의해 모조리 

깨지게 되니까 남성우월주의가 당시 기풍이었던 일본에게는 

상당히 큰 수치였을거라 봅니다





“황후께서는 마흔 살을 넘기신 듯했고 매우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여성이셨다.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셨다.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시면 황후의 얼굴은눈부신 지성미로 빛나셨다.나는 황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나는 황후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조선의 황제 뿐 아니라 그 외의 많은귀족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황후의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있었다.”

고종황제는 명성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일을 의논할 수있는 그녀 "그의 정치인생 동반자"로까지 생각했다.

1883년 서양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 부인 로즈 푸트는 


“그녀를 뛰어난 침착성(master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빛 (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이라고 묘사했고, 영국의 여행가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는 


“당시 황후는 40세가 넘는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은 차갑고

명성황후의 비녀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언더우드 부인은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들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훗날 황후가 시해된 후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일개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당시 일본으로써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 밖에는 방책이 없었다…(중략)” 라고 기록했다.



미국 공사관 통역관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외교관으로서의 황후는 발군의 기량을 발휘했다. 구미 열강과 이권 문제를 처리할 때면 황후는 고종에 앞서 사안 하나하나를 세밀히 검토하고 이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는데, 그 논리가 치밀하고 정연해 외국 공사들을 감탄시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오랜 망명생활을 했던 서재필이 광복 뒤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명성황후 앞에 나가면 으레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다. 민황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다.”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언제 고착 되었나.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이 조선국정에 깊이 개입하면서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죽인 왕비의 이미지를 때려 죽여서 시원찮을 악녀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겠죠.

일본은 그렇다 치지지만 이에 가장 일조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골수 유학자인 매천 황현입니다.

매천 황현은 동시대의 유학자이며 국권이 피탈되자 음독자살한 인물로 절개있는 우국지사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을 신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황현이 과거 급제한 때인 1885년은 개화를 향해 급진이냐 온건이냐를 다투던 때로 고루한 유학자가 명함을 내밀만한 정국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낄자리가 마땅치 않자 시대가 혼란하다는 핑계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숨어든 유학자로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황현이 전라남도 구례에 은거하면서 집필한 것이 매천야록인데 이 것은 당대의 정세를 동시대 사람이 저술했다는 면에서 가치 있지만,
더불어 정국의 한가운데 있었던 직접 겪은 사람이 아닌 멀리서 주시하며 자신의 사견을 입혔다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는 책입니다.

즉, 당시 한양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사건을 한반도 땅끝에서 풍문으로 들으며 적은 것이 매천야록입니다.

황현이 보기에 개화파의 중심은 명성황후였기에 개화파와 싸잡아 비난한 것일 뿐 매천황현은 명성황후를 일면한 일이 단 한번도 없는 인물입니다.

그의 책에는 시대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개화파와 그 중심인물인 명성황후에 대한 매우 안좋은 평들이 즐비 합니다.

거의 대부분 들은 풍월을 옮겨 놓은 것이며, 1892년 운현궁 폭탄테러 사건은 대놓고 명성황후가 배후라고 지목하였습니다.

지금도 국역되어 출판되 쉽게 구해 볼수 있는 매천야록은 명성황후의 악녀 이미지를 고착화 시킨 책 중 하나 입니다.

더불어 일제 35년 동안 꾸준히 주입된 왜곡 교육은 명성황후의 이미지가 나라를 말아 먹은 여자로 만드는데 부족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매천야록도 황현의 왜곡의 시선은 있는 법인지라 동학을 도적이라 표현했고, 


처음에는 의병도 부정적으로 보는 등 여러 한계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그는 자결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시에서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라고 했죠



당시 대한제국 백성들이 명성황후를 나라를 망친 여인으로 보았다면, 백범 김구 선생같은


사리분별이 분명한 어른이 나루터에서 국모시해범으로 의심되는 왜놈장교를 척살하고 


인범이 되고 사형을 안도 받앗겠습니까?


애국충정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흐르고 있는 김구선생님의 


'백범일지'만  읽어보아도 당시의 우국지사들이 


명성황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명성황후와 관련된 글들을 살펴보면, '백성을 수탈하고, 사치가 극심했으며 매관매직으로 얻은 재산을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모두 탕진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를 흔히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은 인위적으로 와전시켜 모든 사건의 원인이 명성황후와 민씨세력에게 있다는 식으로 역사를 재조명한 글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 입니다. 이는 엄연히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개인의 생각이나 주관성이 개입된 역사해석을 마치 숨겨진 진실인 것 처럼 주장하는 글들을 보고, 역사를 배우는 학생들과 어린이들에게 역사관의 혼란을 심어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명성황후와 관련된 악행의 진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우선 명성황후와 관련된 악행이나 부정행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명성황후의 악행이라며,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내용들은 실제 역사에 기록된 내용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들의 출처가 어디인가 확인해보니, 소설작가가 쓴 소설에 바로 이러한 대목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대중매체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기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 소설에서 명성황후가 사치가 심하고,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며, 심지어 무당에게도 관직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싣게 되면, 당시의 사람들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의 출처와 인용된 내용들의 원본인 무엇이냐는 것인데, 바로 일본의 저널리스트 기구치 겐조(菊池謙讓)가 쓴 소설 '대원군전'이 그 모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구치 겐조는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했으며, 1910년 명성황후 시해의 책임을 흥선대원군에게 떠넘길 목적으로 '대원군전'을 출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일본인이 쓴 소설의 내용을, 한국인 작가가 다시 인용하여 소설로 출판한 것이지요. 기구치 겐조의 소설에는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대립구조를 형성시켰고, 대립구조를 좀 더 긴박하게 늘어놓기 위해서 '완화군 세자설' 등 수 많은 스토리들을 끼워 넣었지만, 이러한 내용 모두 실제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목들입니다.

 

더불어 역사를 왜곡하고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간의 갈들을 극대화시켜 조선멸망의 원인으로 두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 소설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던 고종황제는 자연스럽게 무능하고 방황하는 왕으로 굳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역사가 일반인들의 인식으로 굳혀진 것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설에 등장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소설에는 실제 역사와 전혀 무관한 상상들이 기술되어 있으며, 작가의 상상을 실제 역사라고 인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대중적인 소설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 즈음은 이 소설을 접하였고, 소설의 파급력이 막대하다보니 마치 실제의 역사처럼 인식되고 있다는 점 입니다.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는 19세기 조선을 방문하고 명성황후를 직접 알현한 영국인 비숍이 조선의 상황과 명성황후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기행문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왕비의 헤어 스타일은 보통의 조선 여인들과 꼭 같았다. 머리 가운데에 가르마를 타고 뒤에 쪽을 튼 것이다.그 헤어 스타일 위에 단지 검은 밴드로 묶은 작은 장식품을 치장 했을 뿐이다. 왕비는 몸을 치장하는 보석 장신구들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았었다. 공식 장소를 빼 놓고는 목걸이나 브로치 또는 팔찌를 패용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왕비라는 지위로 보아서 그 녀는 수많은 반지를 가졌을 만도 하지만 보면 어느 유럽인이 선사한 듯한 반지 한두 개만을 항상 끼고 있을 뿐이다. 그 녀가 좋아했던 장신구라 할 만한 것은 허리띠에 차는 노리개이다.그 녀는 이 금과 비단 실로 만든 매듭 장식만은 여러 개를 가지고 있고 복장에서 애용했다.


중간키에 몸매는 호리호리 하고 곧았다. 얼굴은 길고, 이마는 높고, 코는 길고 가늘며 귀족적이고, 입과 아래턱에는 결단력과 개성이 드러난다.

광대뼈는 튀어나와 있고, 귀는 작고, 얼굴빛은 기름진 저지 크림색을 띄었고, 눈썹은 아치모양이고, 아몬드 형의 눈은 지적이고, 예리해 보였다.?


왕비는 옷이 많아서 자주 갈아입는다. 어떤 날은 금박을 수놓은 진홍빛 능라를 입고, 어떤 날은 자주색 옷을 입는다. 그런데 그녀는 보석류를 좋아하지 않는다. 길고 가는 손은 모양이 예쁜데, 다이아몬드로 빛난 적이 없다. 유일하게 끼는 반지는 묵직한 금가락지 인데 항상 손가락 하나에 쌍으로 끼었다.?


목걸이나, 브로취, 팔찌를 한 것을 본 일이 없으며, 반지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왕비가 유럽의 제품을 한 두 개 이상 낀 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도 다이아몬드가 크거나 많이 박히지 않은 것 이었다.

또한 멋진 시계를 몇 개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차지 않았다.



당시,?조선의 변혁을 좌우하는 인물?인 명성황후는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처지였다고 본다. 그런데 사치하지 않고 검소한 것으로 표현되는 명성황후는 다이아몬드 장신구는 거의 하지 않고 유일하게 착용하는 것은 금으로 굵직하게 제작된 반지 한 쌍인 것이다.

 

한국 복식 문화사전에서는 ?가락지는 원래 장식물이기보다는 신분확인을 위한 신표인 신물(信物)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남녀의 애정에 대한 믿음과 절개의 징표로 쓰였다?고 정리되어있다.

 

가락지가 장식적인 의미만 있었다면 명성황후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고귀한 보석이 박힌 장식적인 반지로 인정하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었을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에게 가락지는 그 이상의 뜻이 있기에 그 가락지만 끼는 것을 고집하였다고 본다.




명성황후는 왜 가락지만 끼었을까?

명성황후의 입장에서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조선을 침탈하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열강들 속에서 조선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위기일발의 위태로움 속에서 조선의 철학과 왕실의 영광을 담고 있다는 쌍가락지를 끼고 있으므로 정신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까? 명성황후의 가락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염원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한국에서의 가락지에는 가문의 영광과 후손 번영을 기원하는 염원과 음. 양 화합의 뜻이 들어 있는 상징적 장신구 이다. 명성황후는 당시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염려하면서 가문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가락지를 끼고 가락지에 의지하며 어려운 나날을 견디고 있었던 것 같다.

다이아몬드 같이 고귀하고 값비싼 보석 장신구 보다는 가문의 영광을 표현하는 가락지를 끼고 있는 것이 황후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명성황후를 직접 알현하고 남긴 기록에는 명성황후는 사치와는 거리가 먼 인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외국의 인사들에게 최대한 부유하게 보이는 것이 조선의 국위 향상에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명성황후는 외국 국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도 큰 치장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명성황후의 악행 스토리에 빈번히 등장하는 사치에 대한 대목으로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부분이지요.

 

일각에서는 대원군이 10년간 축적해놓은 재정을 명성황후가 1~2년만에 파탄시켰다는 글들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대원군은 경복궁 재건을 무리하게 진행시키다가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당백전까지 발행하였습니다. 결국 무리한 경복궁 재건사업과 당백전의 발행으로, 조선은 경제 인플레를 겪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대원군이 10년간 축적해놓은 재정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명성황후와 관련된 대부분의 내용들은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내용들이 소설 속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허구입니다. 또한 실제 역사를 고증한다면,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정확한 역사고증 없이 무작정 비난하는 행위는 하루 빨리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개화정책에 따른 고종과 명성황후의 최대약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개항 이후 물가 폭등으로 인한 하층민의 생활고가 국가에 대항 할 정도로 혹독했던 상태였고,
여러가지 시각의 차이와 개화에 필요한 새로운 기구의 요직을 민씨 일가가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불신과
오해를 부르기 쉬운 것이었죠
직접적인 명성황후의 고종의 의도보다 그에 관한 주변사람들의 평가와 소문에 의해 잘못 알려진것도 많지요

모든 관점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라는 말이 있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볼 때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며 내면화 시키고 있죠 이러한 무비판적인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할 때 구습이라 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종과 명성황우의 경우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평가를 대체로 지식인의 기록의 범주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경우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매천야록은 저자의 직접적인 관찰보다는 거의 풍문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한 예로 명성황후가 자식들의 죽음에 기도비용으로 많은 돈을 쓰고 무속에 빠지는 것을 평범한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고 있고 또한 총기 있고 전략도 풍부하여 언제나 고종 옆에서 고종을 도왔다고 한 반면 20년 동안 정치에 간섭하여 나라를 망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천고의 변을 당했다라고 평가한 것은 왕비의 입장에서 국정에 간여한 월권행위로 보았으며 이것은 즉 유교적 지식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세기의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의 성장을 어렵게 하듯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사대봉건사상이 고종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방해하였습니다. 또한 정치경제사상을 도입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추진력이 필요로 하나 너무 소심하고 온건하여 재래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주위의 반대를극복하지 못하고 정책실행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달래고 일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고종이 유약하고 줏대가 없다고 평가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태껏 고종이전의 왕들 역시 왕의 자리에는 앉아 있으나 허수아비의 역할 밖에는 하지 않았다. 실질적은 권력행사는 여러 당파들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그런 허수아비의 왕의 자리를 벗어나 왕권을 행사 하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 했듯이 고종은 강압적이지 못해 그런 강압적 추진을 명성황후가 대담하게 추진하고 도와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 듯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성황후의 평가가 부정적인 이유는 고종의 불만이 불똥이 되어 명성황후에 튄 것이 아니까 싶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왕의 자리와 왕비의 자리에 올라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 이유 역시 다른 사람들의 욕심을 체우기 위한수단으로써 올랐기 때문에 두 부부가 정치적으로 대립할 원인이 없으며, 또한 지지기반의 세력이 약한 부분에서는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공생적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큰 맥락의 정치 방향과 이념은 같았으나 방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 역시 즉위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를 수없기 때문에 보인 차이이며, 그렇다고 해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살펴 볼 때 고종과 명성황후 공통적으로 쇄국정책을 거부하고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으로 이웃나라의 변화된 문물시찰을 한 것이 그것이며, 갑신정변이후 친 서방정책을 위한 것입니다. 즉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미국에 도움을 청한것이죠.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대원군과 외세라는 큰 세력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처세로 보일 뿐 정치적으로 고종이 무능한 왕이며, 명성황후가 권력을 탐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라는 말이 있숩니다
우리는 역사를 볼 때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며 내면화 시키고 있죠 이러한 무비판적인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생각할 때 구습이라 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것을 무의식 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종과 명성황우의 경우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평가를 대체로 지식인의 기록의 범주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의 경우 황현의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매천야록의 거의 풍문에 
기인하고 있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는 그 능력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한 예로 명성황후가 자식들의 죽음에 기도비용으로 많은 돈을 쓰고 무속에 빠지는 것을 평범한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고 있고 또한 총기 있고 전략도 풍부하여 언제나 고종 옆에서 고종을 도왔다고 한 반면 20년 동안 정치에 간섭하여 나라를 망치게 하였고 그로 인해 천고의 변을 당했다라고 평가한 것은 왕비의 입장에서 국정에 간여한 월권행위로 보았으며 이것은 즉 유교적 지식인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9세기의 민족주의가 우리나라의 성장을 어렵게 하듯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사대봉건사상이 고종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방해하였습니다. 또한 정치경제사상을 도입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추진력이 필요로 하나 너무 소심하고 온건하여 재래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주위의 반대를극복하지 못하고 정책실행 개혁에 반대하는 신하들은 달래고 일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고종이 유약하고 줏대가 없다고 평가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여태껏 고종이전의 왕들 역시 왕의 자리에는 앉아 있으나 허수아비의 역할 밖에는 하지 않았다. 실질적은 권력행사는 여러 당파들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는 그런 허수아비의 왕의 자리를 벗어나 왕권을 행사 하려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 했듯이 고종은 강압적이지 못해 그런 강압적 추진을 명성황후가 대담하게 추진하고 도와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부정적인 평가가 나온 듯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성황후의 평가가 부정적인 이유는 고종의 불만이 불똥이 되어 명성황후에 튄 것이 아니까 싶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왕의 자리와 왕비의 자리에 올라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 이유 역시 다른 사람들의 욕심을 체우기 위한수단으로써 올랐기 때문에 두 부부가 정치적으로 대립할 원인이 없으며, 또한 지지기반의 세력이 약한 부분에서는 정치적으로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도와주는 공생적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큰 맥락의 정치 방향과 이념은 같았으나 방법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것 역시 즉위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다를 수없기 때문에 보인 차이이며, 그렇다고 해서 서로 정치적으로 대립적 관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개항과 개화정책을 살펴 볼 때 고종과 명성황후 공통적으로 쇄국정책을 거부하고 문호개방을 추진한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으로 이웃나라의 변화된 문물시찰을 한 것이 그것이며, 갑신정변이후 친 서방정책을 위한 것입니다. 즉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미국에 도움을 청한것이죠. 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대원군과 외세라는 큰 세력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처세로 보일 뿐 정치적으로 고종이 무능한 왕이며, 명성황후가 권력을 탐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개화정책에 따른 고종과 명성황후의 최대약점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개항 이후 물가 폭등으로 인한 하층민의 생활고가 국가에 대항 할 정도로 혹독했던 상태였고,
여러가지 시각의 차이와 개화에 필요한 새로운 기구의 요직을 민씨 일가가 차지하고 있는 것 역시 불신과
오해를 부르기 쉬운 것이었죠
직접적인 명성황후의 고종의 의도보다 그에 관한 주변사람들의 평가와 소문에 의해 잘못 알려진것도 많지요


평범한 왕비인 명성황후가 왜 일상에서 벗어나 국정에 간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또 어떤 연유에서였는
가를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자 책봉문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완화군이 태어나고 귀여워하던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에 명성황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대원군 견제에 나서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처음 왕자를 낳았을 때 대원군이 보내 산삼을 먹고 왕자가 죽었다고 믿은 명성황후의 적개심이 더욱 고조되어 있었고, 10년 에 걸친 대원군의 철권통치가 성년이 된 국왕 고종에게 큰불만 이였을 것이에요. 그로 인해 고종 스스로 생부인 대원군에게서 왕권을 빼앗을 의지를 다지는 길에서 명성황후가 개입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즉 대원군에게 정면도전하기에는 유교적 윤리관에서는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되므로 명성황후를 내세워 아버지인 대원군을 몰아내고 자신은 뒤에 숨어 불효자의 이름을 가지지 않으려는 방법 이였을 수도 있다. 이점에 대해 명성황후가 대원군과 고종이라는 부자간의 권력 갈등 속에서 희생물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개항 초기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정책은 철저하게 청의 권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876년 조일수교와 1882년의 조미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개항과정은 청의 이홍장이 전통적 이이제이 정책에 따라 조선에 여러 열강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상호 견제 하에세력균형을 이루게 하려는 전략에 따라 이루어졌죠. 이 과정에서 청은 러시아의 침략위협을 과장하여 조선의 집권층에게 과도한 공러 의식을 불어넣었습니다.
개항 초기에도 고종은 이러한 청의 의도대로 1880년 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조선책략을 금과옥조로 삼아 청의 외교 전략을 그대로 따르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청의 속방화정책이 가시화 되자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죠.
명성황후 역시 임오군란 당시 청에 파병을 요구하여 친청파로 인식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청이 조선에 대한 속방화정책차원에서 청이 결정한 것이지 명성황후나 고종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임오군란의 영향으로 민씨일가는 죽임을 당하거나 피난을 가있었고 명성황후 역시 시골로 도망가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이로써친청파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잡은 일본이 보호국화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반발한 고종과 명성황후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회복하고 개화정권과 일본세력을 동시에 제거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러시아의 신속한 3국간섭 주도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본 후에 더욱 친러정책에 확신을 가지고 러시아 공사와 은밀히 교섭하면서 까지도 일본에 정면도전을 시도하였습니다. 
외교정책에서도 고종과 명성황후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국제관계를 이끌어 나아갔죠. 공통점은 처음에는 사대관계를 가지고 외교에 임하던 청국의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청을 견제하려하는 이유는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청이 조선을 청의 일부로 취급하여 내정 간섭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이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후광이 된 청의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려함입니다. 그러나 청을 견제하는 방법에서는 다시 의견이 같아지죠. 즉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서양세력과 외교관계를 성립시켜 견제하려했는데 이 나라가 바로 러시아입니다. 이렇듯 청을 견제하려는 의도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개인적인 차이를 보이나 결과적으로는 러시아등의 서양세력을 이용하여 청을 견제하려 함은 공통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죠.


역사의 결과는 개인과 여러군집, 나라의 의도적인 참여와 세계정세의 흐름에 의해 가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흘러갈수도 있고 그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습니다또한 명성황후라는 인물인 현재 후대에 와서 상당히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먼저 고종을 유약한 왕 즉 능력 없고 부인인 명성황후에게 권력을 빼앗긴 왕으로 평가, 반면 고종의 정치적인 능력 즉 자기 주도적인 왕 이였음을 평가하다 보면 남편의 권력을 탐하는 표독한 여인, 남편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여흥 민씨 세력과 함께 온갖 부패와 사치를 일삼은 수구세력의 핵심이자 시아버지와 권력다툼을 하는 부덕한 며느리로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은 절대적 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고종의 경우 지금까지 고종 개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일제 식민지시기 동안에 일본이 한국의 정체성과 국민의 마음을 왕실에서 멀어지게 하기위해 왜곡된 정보 즉 고종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부각시켰다는 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또한 고종의 경우보다 더욱 논란이 많은 명성황후의 경우에는 왕조시대 중전이라는 위치 상 그 정치적 언행이 실록과 같은 공식 자료에 기록되어져 있지 않은 탓에 황현의 「매천야록」과 같은 야사류에서 전하고 있는 전문기록과 식민지 시기의 어용학자, 저널리스트들이 남긴 자료, 명성황후를 직접 만나본 서양인들이 남긴 견문기에 의존해왔다. 이러한 각각의 자료 모두 객관적이기 어려운 주관적인 결과물 즉 신뢰도 문제가 발생 될 수 있는 문서이며 과대해석, 왜곡가능성을 지닌 것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뢰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이렇듯 고종과 명성황후의 학계의 연구는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또한 현대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 지면서 개항에서부터 일제 강점 직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고종의 초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대원군과 명성황후사이에서 우왕좌왕한 유약한 군주라는 인식을 버리고 개화를 추구한 개명군주라는 새로운 평가를 하고 있으며 명성황후가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로써, 민비와 고종과의 관계는 이성이나 정치에 의해 결합된 부부라고 평가하며, "명성황후는 이러한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여성이지만, 앞장서서 왕실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경세가적 선경지명과 불굴의 투지로 일본의 내정간섭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다.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팽배하던 그 시기이지만 국가유사시에는 기존의 관습을 깨고 일어나 당당하게 적과 대항한 데에서 우리는 명성황후를 현대 여성의 효시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동북아문화연구소에서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나라별 외교적 행동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가 정치적으로 연계가 되어 있으며 고종이 나약하거나 의존적인 왕이 아니며 명성황후 역시 권력을 탐하는 왕비가 아니였음을 알수 있지요.







(펌글) 명성황후는 타고난 여걸로 어려서 부터 총명했으며, 독서를 아주많이 하여 박학다식하고 고종의 일급참모 역할을 톡톡히 했고, 자기절제를 통해 검소했고 외교술의 귀재이며 선견지명이 있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열강의 최신식무기앞에 그냥 앉아서 당하는 꼴이 될 수 밖에 없다 여기고 오히려 개화정책을 통해 그들과 외교함으로써 좋은것을 받아들여 조선의 힘을 키우려 했다고 합니다.
또 민씨 일파를 기용한 이유는 그녀에겐 그녀를 바쳐 줄 지지세력이 미약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 시키기 힘들었기 때문이며 민씨중에서도 주로 인재를 등용했다합니다. 
알려진것 처럼 민씨세력은 외척으로 왕을 위태롭게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성황후의 명령에 따라 왕을 보좌했다하고, 또 시아버지와의 곤란한 관계도 실은 계속 지속되지 않았고 화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시해사실을 대원군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시해 당시 대원군을 납치해 그장소로 보낸거구요. 
외세를 이용하긴 하였으나 그것또한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치는 '이이제이'정책을 택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노력만큼 되어주지 않은게 안타까울 따름이죠

또한 그녀가 죽고나서야 비로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힘의 균형을 잘 맞추었기 때문이요, 또 일본에게 그녀 한명은 결코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일본이 명성황후를 왜곡시킨것은 명성황후시해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일 교류사이트 같은데 가봐도 명성황후 이야기가 나오면 일본애들이 주로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그런 고약한 민비를 죽여주면 오히려 두손 모와 고마워 해야된다고 합디다. 정말 황당할 따름이죠. 그게 바로 그아이들의 궁색한 변명입니다. 


--------------------------------------------------------------------


                                  
짱공이시다의 최근 게시물

자유·수다 인기 게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