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연습 (1)

NEOKIDS 작성일 15.02.11 0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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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신춘문예 당선작

거짓말 연습

백수린 작가의 글을 축약하는 연습

 

 

도시의 사람들이 기다리던 여름이 되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몇 달째, 나는 사람들이 왜 여름을 기다리는지 깨닫고 있었다. 꽃이 피고 지는 나날들 속에서도 공기는 오랫동안 습하고 추웠으니까. 겨울이 길었던 만큼 여름이 다가오는 속도는 느렸다.

 

우유나 유제품들은 쉽게 상하기 시작했고, 냉장고가 없는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장을 보았다. 기숙사의 대부분은 나처럼 곧 떠날 사람들이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떠날 사람과 머무를 사람은 쉽게 구분되었다. 떠날 사람들은 대부분 냉장고를 사지 않았다. 대신 대형마트에서 주는 커다란 장바구니에 먹을 것들을 담아 매일 저녁 창문 밖에 매달아 두었다. 해질녘, 건물의 창밖에는 그런 색색의 장바구니들이 위태로운 곡예사들처럼 매달렸다. 장바구니가 달려있지 않은 방은 둘 중 하나였다. 빈 방이거나, 장기체류거나. 냉장고가 없는 여름은 불편한 계절이었다. 상하기 전에 재빨리 먹어야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유럽의 여름을 기다렸다.

 

책상에 둔 요구르트가 이틀 만에 상하기 시작하던 때, 방에선 바퀴벌레도 나타났다. 기숙사 중 가장 싼 월세방.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인지, 프런트 직원은 그저 살충제 한 봉지를 줄 뿐이었다. 바퀴는 살충제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기어 나왔고, 온몸이 가려워 잠을 잘 수 없는 날이 늘어났다. 그럴 때마다 시계를 보며 한국의 시간을 가늠하는 버릇이 들었다. 시차는 일곱 시간. 잠자는 시간에 엄마나 그는 하루를 분주히 시작한다고 상상하면 어색해졌다.

 

어학연수로 프랑스에 있게 된 지도 여러 달 째였다. 고등학교 때의 불어 실력 정도론 유학생활이 어려울 거라는 유학원의 조언에 따른 결정. 기숙사엔 한국인이 몇몇 있었지만 단기간에 불어 실력을 높이려면 어울리지 말라던 상담자의 충고에 따르느라 외면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인들과 어울렸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능하면 그 누구와도 말 섞지 않고 고요하게 지내고 싶었다. 결혼 직후에 그만둔 미술을 해보고 싶다며 이 곳까지 온 것도 그래서였다. 단 4개월의 체류기간 동안 나는 그 어떤 관계도 맺을 생각이 없었다.

 

파업은 내 체류기간을 늘리려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택시들, 그 다음은 식품점 계산원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 덕에 알게 된 대중교통수단 노조의 파업. 라디오를 듣는 게 아직 힘든 학생들에게 어학원의 선생은 전국적인 파업이 왜 일어나는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각지에서 온 학생들이 나라 수만큼 다양하게 반응했다. 언제 끝날까? 이런 궁금증을 곧 끝날 거라며 애매한 반응을 보이는 프랑스 사람들은 풀어줄 수 없었다. 큰 문제는 그 파업이 전국적이었다는 것이다. 우체국까지 동참하면서 진학할 대학에서 보낸 합격서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남아도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갑니까?

 

어학원의 선생이 묻자 각자 고국의 발음과 억양이 녹아든 프랑스어로 학급의 사람들 대부은 떠난다고 답했다. 고국으로, 진학할 학교가 있는 다른 도시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까?

 

선생은 또박또박 느린 속도로 다시 질문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사답게 그의 말은 정확하고 간결했다. 그리고 곧이어 누군가가 화답했다. 아니오,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이 맘에 들었다. 르블랑 부인의 집을 방문하는 날을 빼면 나는 주로 구립도서관의 구석에 앉아 어학원 선생이 내준 숙제를 했다. 르블랑 부인은 어학원에서 내게 주선해준 대화 상대였다. 어학원에는 지원자들에 한해 대화상대를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자원해 온 대화 상대자들은 대부분 말벗을 원하는 노인들이었고, 르블랑 부인도 그 중 하나였다. 자식들 모두 출가하고 남편과 사별한 지 오 년째인 르블랑 부인은 내가 찾아갈 때마다 커다란 거실 한복판에 우두커니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미국 드라마나 퀴즈쇼 같은 것들을. 내가 가면 부인은 그제야 티브이를 끄고 대화를 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좋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르블랑 부인은 가는귀를 먹었고, 나는 틀린 어법의 말들을 더듬더듬 잇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뭐라고? 뭐라고요? 라는 질문으로 정해진 시간을 대부분 채웠다. 약속 기간 동안 지원자가 먼저 그만둬서는 안 된다는 강제조항만 아니었어도 벌써 포기했을 터였다.

도서관에서 숙제를 마치고 기숙사로 되돌아왔을 때, 프런트의 직원이 나를 불렀다. 직원의 말은 너무 빨라 알아듣기 힘들었다. 몇 번이나 다시 말해 달라 부탁하는 가운데 그녀도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그녀는 그제서야 내 앞에 서류를 밀어놓는다. 다음 학기에도 기숙사를 이용하려면 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서류를 보고서야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다음 학기에는 없을 거라고 설명하려다 나는 그냥 서류를 들고 방으로 올라갔다. 우편함에는 대학의 입학허가서는 들어있지 않았다.

 

3층 기숙사 복도에 간장이 밴 중국요리 냄새가 진동했다. 주로 동양인들에게 배정되는 K동 기숙사 사람들의 대다수는 중국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여럿이 모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나는 그들이 음식을 먹으려고 분주히 떠들고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했다. 간장 냄새에 식욕이 돋았다.

남편은 간장으로 조린 음식은 무엇이든 좋아했다. 내가 특별히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그는 조린 것만 있으면 밥을 맛있게 먹었다. 입이 짧은 나조차도 식욕을 돋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위해 요리책들을 뒤지며 조림 레시피들을 스크랩하기도 했던 날들. 쓸데없는 상념이 찾아드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우듯 서둘러 내 기숙사 방으로 가 문을 잠갔다.

 

어학원 종강 일주일 전, 선생은 우리가 보게 될 시험에 대해 알려주었다. 통과한 학생들에게는 한 달 후 자격증이 발송될 것이니 배송 받을 주소를 적어 내라고도 했다. 아침에도 확인했었지만, 우편함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내가 한 달 후 어디에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기에, 주소를 적어내는 것을 망설였다. 이젠 역사공부를 하러 파리로 갈거니? 종종 짝이 되어 공부했던 이탈리아인이 내게 물었다. 그제서야, 수업 중 역사 공부를 위해 왔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옆방의 스테판에게는 영화를, 버스 옆자리의 노인에게는 향수를, 공부할 거라고 말했다.

떠나는 사람들은 상대에게 진실해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이 곳에서의 몇 달 동안에 깨달은 점이었다. 떠날 사람들은 보여주고 싶은 만큼만 드러내며 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여기에서의 나는 거짓말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봐야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새로 배운 단어를 활용하고자 했던 뜻이 더 컸다. 좋아하는 색깔은요? 빨강입니다. 파랑입니다. 노랑입니다. 상대에게는 진실하지 않아도 되고 관심도 끌지 못할 사소한 말들. 내 아버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따위의 교재 속 문장들. 내게는 여동생이 있는데, 그녀는 학생입니다 따위의 상대가 결코 확인 못할 것들. 그런 판에 박힌 문장만으로도 대화는 이어져 나갔다. 그 이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에, 되려 안심을 느끼고 있었다.

엄마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그건 엄마의 소통 방식이었다. 엄마의 거짓말은 나의 것과는 뭔가 달랐다. 생동감 같은? 엄마는 언제나 거짓말을 했다. 이를테면 엄마는 어느 누구에게도 같은 고향사람이 될 수 있었고,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과부, 이혼녀, 미혼모가 되기도 했다. 그런 거짓말을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와 나 사이에 솔직함이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떠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왜 떠나니, 결혼생활은 어떻게 되는 거니, 언제 돌아올 거니 같은 따위 질문을 엄마는 퍼붓지 않았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 엄마는 답했다. 어련히 알아서 하려고. 어쩐지 서운했다. 차라리 엄마가 내게 그런 질문들을 하며 다그쳤다면, 마음이 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너무 오래 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을, 계속 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예정대로 금요일 세 시에, 르블랑 부인을 만났다. 의무적인 만남도 이제 몇 회만 남아있는 시점이었다. 부인은 여전히 어두운 거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비스듬히 각도를 두고 앉아 안부를 물었다.

새로운 일은 없니?

곧 시험을 볼 거에요.

오, 시험. 공부는 많이 했니?

나는 계속되는 파업 때문에 다음 학기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 괴롭다, 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럴 재간은 내게 없었다. 그래서 대신 짧게,

파업은 언제 끝나나요?

뭐라고?

언제 파업이 끝나나요?

뭐라고?

파업은 언제 끝납니까?

한숨은 나오고, 부인의 얼굴도 짜증을 담았다. 대화가 끊어지자 부인은 티브이를 켰다. 같이 볼래? 일어나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채워야 할 시간도 있었다. 스크린에 빛이 흘러넘치고, 귀가 안좋은 부인 탓에 소리는 엄청 키워놓아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시끄럽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티브이를 보고 있자니 되려 한국말로 크게 떠들어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말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당신은 나를 하나도 몰라요. 그동안 만나왔지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한 마디도 밖에 내진 않았다. 퀴즈 프로그램의 끝을 알리는 로고송과 자막이 흘러나오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가 혹사당했던 탓인지 집 밖으로 나서자 세상은 사뭇 조용하게 느껴졌다. 광장 한복판의 루이 14세 동상 아래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관광안내소 근처의 꽃집에서 산 꽃다발을 들고 광장을 가로질렀다. 요란한 머리치장의 십대들은 요란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고, 저 멀리 푸르비에르 언덕 위에는 대성당이 빛나고 있었다. 대성당은 그 도시의 자랑거리였다. 푸르비에르에 한 번 가보렴. 르블랑 부인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찾아가 본 적이 없었다. 한쪽 끝에는 피에로가 꼭두각시 인형극을 하고 있었고, 나는 구경하는 무리 속에 녹아들었다. 음악소리에 맞춰 인형들은 춤추었다. 피에로의 발음이 부정확해서 그가 하는 말을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에 따라 손뼉치고 웃고 아아아, 하며 아쉬워했다. 갑자기 꼭두각시 인형 하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인형이 내게 뭔가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머뭇대자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피에로는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나요? 일본에서요. 와! 아주 멀리서 온 손님이군요! 꼭두각시 인형이 내 앞에서 경쾌하게 발을 굴렀다. 사람들은 모자에 동전을 던져주었다. 나도 그렇게 하려 했지만 주머니 속에서 동전은 잡히지를 않았다.

 

주말에는 뭘 할 건가요?

뭐라고?

주말에는 뭘 할거냐고요.

아,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려야지. 너도 주일에 미사를 드리니? 세례는 받았고?

네?

세례는 받았냐고.

‘세례 받는다’ 가 무슨 뜻인가요?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불을 끄기만 하면 바퀴벌레들이 기어 나와 스멀스멀 몸 위를 거니는 것만 같았다. 불을 켠 채로 선잠을 자야만 했다. 잠결에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정대로라면 열흘 후 이 도시를 떠날 것이기에 바퀴벌레쯤은 참고 넘어가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입학허가서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방의 곳곳을 살폈다.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다. 매트리스를 들어 올려야 할 것 같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떼를 지어 득실대고 있다면? 생각만으로도 몸이 참을 수 없이 가려워졌다.

나는 기숙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도시는 이미 밤이 깊었고 갈 곳은 없었다. 별수 없이 기숙사 앞 벤치 쪽으로 터덜터덜 향했다. 손에 꼭 쥔 핸드폰의 액정에는 음성 메시지의 도착을 알리는 표시가 며칠 전부터 떠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음성 사서함에는 엄마의 이 두 마디만 남아있었다. 아마도, 외국인의 안내멘트에 당황한 탓이리라.

나는 집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처음 왔을 때는 엄마에게 일주일에 한 번쯤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은 건지 몰랐다. 일곱 시간의 시차보다 더 먼 거리가 우리 사이에 놓여 있었고, 그걸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밥은 잘 먹고 지내냐 같은 말 대신, 애인 삼을 만한 남자는 없냐 같은 걸 물었다. 벌써 여러 명 생겼노라는 나의 너스레에 엄마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어떤 남자들이냐고 묻는 말에 몇 번 스쳤을 뿐인 옆방의 스테판이,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을 뿐인 영국인 제이슨이, 또 전혀 모르고 있는 누군가들이 남자친구가 되어버렸다. 엄마의 애인과는 잘 만나고 있느냐는 내 물음과 엄마의 연애사에 대한 진지한 조언. 그런 것들이 오가는 사이에 잘 지내냐는 뻔한 질문 같은 것은 자리 잡을 틈도 없었다. 당연히, 잘 지내라는 당부 또한 없었다. 나는 그 사람과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엄마는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마지막 번호를 누르지 않은 채 나는 전화기를 껐다. 사방은 다시 어둠뿐이었다.

 

당신의 동네에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오려고 합니다. 당신은 찬성합니까, 반대합니까?

당신은 기업의 고용주입니다. 당신의 직원들에게 며칠의 휴가를 주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까?

 

회화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내 말의 진실함이 아니었다. 유창한가 아닌가가 중요했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문장이 곧 내 의견이 되었다. 때로 그 문장은 내 신념과는 동떨어진 것이었지만, 애초부터 상관없는 일이었다. 날은 계속 더워져 유제품류를 사는 일이 망설여졌다. 건조 햄, 과일, 빵과 잼처럼 실온에 두어도 되는 것들을 위주로 매일 조금씩 장을 봤다. 르블랑 부인과는 침묵의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우편함은 여전히 비어있었고, 파업은 끝이 나지 않았다. 협상은 결렬되기 일쑤였다. 심지어 대학들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행정실의 그 누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프런트의 직원이 계약 여부에 대해 독촉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무작정 학교 쪽 도시의 숙소로 옮길까. 입학허가서가 없이는 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골목 여기저기를 혼자서 많이 걸어 다녔다. 버스 파업인 것도 이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디서 왔니? 왜 왔니? 무슨 일을 하니? 이 곳에서 내게 던지는 질문들은 늘 비슷했다. 그건 내가 넘을 수 없는 언어의 벽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표현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의 부스러기들이 내 안에서 떠다녔다.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멈춘 채, 카페나 레스토랑 안에서 웃으며 이야기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꽃피우지 못한 말들의 씨앗들이 마음 속에서, 번져갔다.

비가 내리는 날도 많았다. 다들 이상기후라고 했다. 가끔 쏟아지는 비를 보며 한국의 여름을 떠올렸다. 비가 내릴 때마다 사람들은 투덜댔고, 빵집이나 치즈가게 주인들은 휴가를 위해 가게 문을 닫기 시작했다. 도시 속의 사람들 수는 확 줄어들었다. 관광객들이 눈에 띄긴 했지만 그 중에도 한국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푸르비에르 성당으로 향했고, 그 곳을 기점으로 삼은 후 각자 가보고 싶은 곳으로 흩어졌다.

 

나는 르블랑 부인과의 작별 선물로 초콜릿 케이크를 하나 샀다. 부인 역시 마찬가지 의미인지 파이를 구워놓았다.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쾌청한 하늘임에도 르블랑 부인의 집안은 늘 어두웠다. 부인은 말했다. 오늘이 죽은 아들의 생일이야. 오늘. 생일. 죽음. 아들. 내가 그 토막들을 잘 이해한 것인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나는 놀라서 쳐다보았다. 다시 또, 몇몇 단어들이 귀에 들렸다. 전쟁. 폭탄. 불길. 아들. 죽었다. 아이는 고작 두 살이었지. 2차 대전이었어. 공습. 폭탄. 떨어지다. 불길. 아우성. 숨다. 하지만 아이는 죽어버렸고, 당신은 오열했던 것일까. 오늘따라 왜 이리 그녀의 말이 잘 들리지?

의아해하던 나는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부인의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던 것을. 부인이 말한 단어들이 조합되자 익히 들어온 전쟁의 한 장면이 떠올려졌다. 그 상투적인, 이미지들. 이러고 있던 걸 깨달은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이와 케이크를 접시에 담는 부인의 주름살 얼굴 위로 슬픔이 담담하게 스쳤다.

너네 별거한다며?

유학을 결심하던 때, 간만에 만난 친구 입에서 나온 문장이 떠올랐다. 별일 아닌듯, 음식을 쩝쩝대고 볼을 부풀리며. 누구한테 들었어? 같은 말은 의미 없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대. 그렇게 전하고, 전해졌을 것이다. 모두 사실이었다. 결혼할 때 뭐든 솔직해지자고 말했던 남편은 3년 후 내게 솔직하게 말했다. 다른 여자랑 잤어. 그러므로, 모두 사실이었다. 그렇게 타인의 사실이 문장이 되면, 얼마나 진부하고, 상투적이 되어버리는지를, 나는 그 때 처음 느꼈다. 3년의 시간이. 무수한 일들이. 단 한 문장으로 끝나버리는 소음 속에서,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전화를 했어요.

르블랑 부인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한국어로 얘기했기에, 당황한 눈치였다. 나 역시 당황했다. 그러나 한 번 열린 문장은, 다음 문장을 부르며 흘러나왔다. 친정에 있던 기간까지 합하면 그와 떨어져 산 지 2년 가까이 됐죠. 우리 이혼하자. 내 말에 남편은 아무 말도 안했어요. 끊고 나니까 우습더라고요. 휴대폰에 통화종료가 4월 1일로 찍혀 나왔으니까. 한국은 만우절이 지났겠지 생각하니 뭔가 상징적인 일 같았어요. 그는 진실을 말하는 날짜에, 나는 거짓을 말하는 날짜에 있다는 것이.

문장이 그쳤다. 오랜만에 가슴에서 빠져나간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했다. 르블랑 부인은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지만, 알아들었을 리가 결코 없었음에도, 알아들었을 것 같다는 느낌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이 없어도 나는 내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케이크는, 달고 부드러웠다.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바퀴벌레 덕에 잠을 또 설쳤다. 커튼을 제치니 푸르비에르 성당이 어스름 속에 서있었다. 문득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떠나기 전, 한 번쯤은 성당에 가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내려가다 보니 3층 계단 옆 게시판의 공고문이 보였다. 모두 같이 음식을 해먹자는 공고. 계약 기간 만료로 남은 음식 재료들을 처치하는 것이 골치 아프던 때,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모를 아이디어는 이렇게 곳곳의 공고문으로 나붙고 있었다. 바깥에서 본 새벽의 기숙사는 가로등 불빛에 창백해 보이고 창문의 쇼핑백 덕에 후줄근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였다. 누군가의 우유는 조금씩 시큼해지고, 누군가는 바퀴벌레 때문에 잠을 못 이룰 것이다. 떠남이 예정된 것을 위안 삼는 사람들의 둥지 밖으로,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위는 여전히 어두웠다.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가늠할 수 있는 건 언덕 위에서 푸르스름한 조명을 받고 서있는 푸르비에르 성당 뿐이었다. 오래된 도시의 적막함 속에서, 내 구두굽이 돌길을 딛는 소리가 유난스러웠다. 좁은 골목들은 어둠에 잠겼고, 나는 내 도시의 번잡한 밤을 떠올렸다. 꺼지지 않는 불빛, 편의점의 음악소리, 크지 않은, 그러나 항상 있는, 소음.

그것들과는 다른 무거운 울림. 시간의 결에 남겨진 누군가들의 이야기들을 휘감아 흐르게 하는 아름다운 두 개의 강줄기. 그리고 그를 따라 넓어져간 도시.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나뿐인 것 같은 침묵의 공간 속에서, 새삼 허기짐을 느꼈지만 가게는 열린 곳이 없었고, 케이블카도 움직이지 않았다. 비단을 운반하고자 만든 수로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자꾸 목이 말랐다.

성당 앞 조망대에 왔음에도 어둠은 여전했다. 나는 성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때까지 나는 성당이라는 것 안으로 들어가 본 역사가 없었다. 이른 시간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간절한 기도들의 틈새에서 촛불을 붙여보았다. 죄를 고백하고, 구원을 빈다는 행위에 대한 실감은 나지 않았다. 대신 일렁이는 촛불과 그것이 밝히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수놓은 갖가지 빛조각들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오르간 소리가 갑자기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성대의 울림들이 높은 대리석 천장에 공명하고, 들어본 적이 없는 찬송가의 곡조는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나갔다.

그 장엄하고 우아한 화음을 듣고 있자니 처음으로, 르블랑 부인에게 가보고 싶은 마음이 솟았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었다.

푸르비에르는 참 아름답군요.

 

기숙사는 음식을 두고 소란스러웠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던 사람들 틈이 어색한 나는 그냥 방에 머물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뭐해, 얼른 나와서 같이 먹어요. 이탈리아, 혹은 스페인계쯤 되어보이는 활달한 여자아이들이 문 앞에서 내게 손짓했다. 갖가지 피부빛깔과 머리색들이 기숙사 안에서 북적였다. 완성된 음식들을 접시에 담아주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뭐해. 가서 받아. 누군가가 내 등을 떠밀었고, 나는 얼떨결에 음식을 받아들어 버렸다. 음식을 받아든 우리들은 식탁의자나 싱크대에 걸터앉아 먹기 시작했다. 한 학기 동안이었음에도 이제야 처음 본 많은 사람들의 통성명과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꾸밈없는 가장 단순한 문장만으로 소통했다. 의미가 해괴한 단어들, 정반대의 어휘가 나오는 실수들.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신기함이 다가왔다. 누구도 상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누구도 온전히 전달하고 있지 않은데도, 대화는 이어지고 있다는 그 신기함이. 아주 적은 단어들, 어조의 높낮이, 손짓과 눈짓만으로, 생략하거나 변형하며. 내가 그려내려는 내 미래가 그러하듯, 묘사한 내 과거는 온전한 내 과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학생이었어요? 아니요. 애인 있어요? 없어요. 미묘한 감정들과 사소한 차이들을 제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참과 거짓도 물론.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진실한 것 단 하나는,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면 거짓말을 내게 처음 가르쳐준 사람도 엄마였다. 날 때부터 곁에 없던 아버지에 대해 묻던 때, 엄마는 새로운 이야기를 항상 지어냈다.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는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가 먼 바다로 떠난 선원으로 변한 후 공장에 위장 취업한 운동권 대학생의 모습으로도 변했다. 덕분에 나는 진짜 아버지의 모습을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어떤 모습이라도 될 수 있었다. 그 여러 이야기들 중 먼 나라에서 떠돌며 집을 지었다는 사나이의 모습을 나는 가장 좋아했다. 사춘기를 지나는 동안엔 종종 이국의 햇볕에 그을리고 탄탄해진 사나이의 팔뚝이 하얗고 가는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는 상상을 했다. 네 아버지가 그날 밤 내게 그 먼 곳에서는 모래바람이 분다고 했단다. 그 바람 이름이 할라스라더구나.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이니. 할라스. 나는 그날 밤, 아버지의 몸 어딘가에 섞여온 모래알로 만들어진 아이는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내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핑계. 엄마는 그렇게, 세계란 그럴듯한 거짓말들에 의해 견고히 다져질 수 있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려 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건전하게 통할 수 있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파스타 더?

스페인에서 온 아이가 내 빈 접시를 보며 물었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빈접시를 건넸다. 불어터진 파스타 면을 삼키며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은, 르블랑 부인을 다시 찾아가 봐야지.

라디오를 타고 파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라디오 진행자는 단정적인 어조로 이야기했지만 이 곳의 사람들에겐 상관없었다. 색다른 어조, 발음, 억양으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마치 성당의 그 성가곡 같았다. 완연한 여름의 공기 속에서 나는 눈을 감고, 그 곡조의 결을 가만히 짚어보았다. 이윽고 익숙해진, 그 합창곡의 울림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는 입술을 살짝 떼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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