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1-1편] : 조조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11 17: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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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제는 지난번에 예고했던 대로 천하통일에 거의 근접했던 삼국지의 인물,

만능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위무제 <조조>에 대해 적어보려 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 여러차례 나눠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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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상당히 엄청나게 미화된 코에이사의 게임 일러스트>

 

<소년기, 청소년기>

조조는 155년 생으로 당시 환관계의 거두였던 조등의 손자, 조숭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이 조등이란 인물은 그야말로 환관계의 대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십상시의 실질적 수장이었던 장양을 몸종부리듯

 

부렸던 인물로 환제 (영제 이전의 황제) 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데 큰 공훈을 세워 양자를 들일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습니다.

(원래 환관은 양자를 들이질 못함)


이때 받아들인게 하후씨의 숭이란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하후돈의 숙부가 되는 사람으로 조등의 양자가 되며

 

조숭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이 내용은 조숭이 원래부터 하후씨가 아니라 조씨였을 수 있다는 논란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배송지가 주석을 달아놓은

 [조만전]의 내용인 하후씨였다는 기록을 따릅니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똘똘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양아치 짓을 많이해서인지 주변에선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교현이라는 사람과 하옹이라는 사람만이 그를 남다르게 평가했는데

 

특히나 교현은 조조를 아주 높게 평가했습니다.

 

조조는 그 사실에 감격해 교현이 죽은 후에도 그의 묘앞을 지날때마다  제를 올려주었을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했습니다.
(교현은 군웅중 한명인 교모의 숙부로 대교, 소교인 이교의 아버지와는 다른 인물)

 

이때 당시는 인물평에 능한 인사나 혹은 정치적으로 학술적으로 유명한 인사에게 인물평을 받는게 유행이었는데


좋은 인물평을 받으면 명성이 크게 높아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좋은 인물평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연의 내에서도 인물비평가였던 허소(허자장)나 학자인 사마휘 같은 인물들이 종종 인물평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교현의 좋은 평으로 인해 조조의 명성이 높아졌고 교현은 허소(허자장) 에게도 인물평을 받아보라 권합니다.

 

그래서 찾아간 허소에게 조조는 다음과 같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는 유명한 인물평을 받게 되죠.

 

"그대는 치세의 능신이고, 난세의 간웅이오"

 

이 내용은 손성이란 사람이 지은 <이동잡어>에 나오는 내용인데 당시를 기록한 책마다 약간씩 내용이 다릅니다.


<정사 삼국지 무제기>에는 "치세엔 훌륭한 신하, 난세에 간악한 영웅"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에는 "평화로운 시기의 간적, 난세의 영웅"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들 옆에서 직접 들은게 아니다보니 어떤 게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공통적인 내용이 하나있죠.


바로 앞으로 다가올 난세의 어떤 형태로든 영웅이 될 것이다 라는 내용입니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흡족했는지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청년기>

이후 조조는 할아버지 빨로 무난하게 20세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합니다.
(효렴이란 후한의 인재 선발제도로 각 지방의 태수나 유력 인사들의 합의로 추천을 받은 인재가 관직에 진출하는 제도)


첫 관직으로 낙양성 북문을 감독하는 일종의 경비대장 직을 맡았는데 누구든 규정을 칼같이 지키도록 했고

 

혹시나 지키지 않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곤봉으로 때려 죽여 명성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십상시의 일원인 '건석'의 숙부의 뚝배기를 깨버리는 일을 저질러 버리게 됩니다.


당시 권세가 극에 달해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그 십상시의 숙부를 패죽였으니 십상시가 빡치는건 당연한 일이겠죠.


더 열받는건 조조의 "난 법대로 했다" 는 당당한 태도. 그러나 조조는 위에도 적혀있듯이 그 조등의 손자였습니다.


조조가 이 할아버지의 빽을 든든히 믿고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이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고


조조는 이 사건으로 크게 명성을 떨칩니다.

 

이후 십상시와의 껄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내쫓기 위한 십상시의 계책이었는지 모르지만 돈구현이란 곳의


현령으로 승진하며 부임했다가 의랑으로 다시 승진해 낙양으로 돌아옵니다.

 

이 시절에 부정부패를 바로잡기 위해 영제에게 여러번 상소를 올리나 당연히 십상시의 농간으로 인해 하나도

 

먹히지 않자 크게 실망해 더이상 상소를 올리지 않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조조는 난세를 예감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역사상 최초로 종교집단이 주도한 대규모 농민봉기인 '황건적의 난' 이 발발합니다.


조조는 기도위에 임명되어 싸움에 참여하였고 예주 영천군에서 황건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워 제남의 상으로 임명됩니다.

 

아마 이때 영천의 유력 호족 가문들과 커넥션이 맺어졌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 순가)


이후 다시 낙양으로 불려갔다가 동군태수에 임명되지만 병을 핑계로 고향인 패국으로 낙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후일 환란을 대비해 사병들을 모집하고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 등 또래의 일가 친척들을 모읍니다.

 

<영웅기>에 따르면 이때 낙양으로 불려갔을 때 유비를 처음 만났다고 하는데 이후 유비와 함께


고향인 예주 패국으로 내려가 사병을 모으는 일을 함께 진행합니다.

 

당연히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있었으므로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과도 이 당시에 친분이 생겼을거라고

 

추측됩니다.
(황건적과의 싸움터에서 만났다는 내용은 연의의 창작)
(흔히들 조조의 근거지가 연주였기에 조조의 고향도 연주인것으로 알고 있지만  조조는 예주 출신으로 패국 초현이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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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예, 청, 서주의 지도와 패국, 영천의 위치> 

 

 

이후, 한수가 서량에서 강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영제는 중앙군 강화를 위해 '서원팔교위'를 새롭게 창설했는데


조조는 '원소', '순우경' 등과 함께 팔교위중 일원으로 임명되어 다시 낙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이 서원팔교위의 수장을 십상시의 한명인 건석이 맡게되며 사실상 환관들의 무력집단으로 전락하게 되는데


이 때 조조는 원소처럼 적극적으로 나서기 보단 뒤에서 관망하는 포지션을 많이 취했으므로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이후 장온에 의해 한수의 난이 진압되고 영제가 사망하게되자 하진이란 인물이

(하진은 하태후의 친오빠로 대장군 직책. 백정 출신)

 

건석을 죽여 서원팔교위 세력을 접수,

 

원소는 다른 군웅들을 불러들여 환관들을 모두 죽여야 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칩니다.


조조는 원소에게 그 주장이 어리석다 비웃으며 하진의 패망을 예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끼워맞춰진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누군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강경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듯..)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세력이 낙양으로 입성하는 것을 꺼렸다는건 분명한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연의에서와 같이 하진이 환관세력에 의해 죽고 환관 세력은 원소가 이끄는 군에 모두 몰살 당합니다.

 

심지어 수염이 없단 이유만으로 참살당한 자가 부지기수.. (이 때도 수염 대머리들은 핍박을...크흡..ㅠ)

 

그리고 동탁이 군을 이끌고 입성해 소제 유변을 폐위하고 헌제 유협을 황제로 옹립합니다. 

 

동탁은 조조를 꽤 믿을만한 인물로 여겼는지 교위직에 제수하지만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달아납니다.
(연의에서는 동탁 암살시도에 실패해 도망간 것으로 나오나 이것은 허구)


이 도망하는 과정에서 '여백사'라는 인물과 그 가족들을 도륙하는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데...
(많은 분들이 여백사를 허구의 인물로 생각하지만 엄연히 여러 역사서에 기록된 실존 인물로 죽인 이유에 대해선 기록이 나뉩니다)


그리고 했던 유명한 말 ,


"내가 남을 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버리게 하진 않겠다"  

 

(사람들 억울하게 죽여놓고 뻔뻔 클라스 ㄷㄷ...)

 

위 이야기는 <위서> <세어> <잡기> 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저 말은 <잡기>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서> 에서는 여백사를 죽인 이유가 여백사가 집을 비운 사이 가솔들이 그의 말과 재산을 빼앗으려 해 쳐죽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어>와 <잡기> 에는 동탁을 저버린 일 때문에 그 가족들이 자기를 도모할까 의심해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상반되기에 추론을 해봐야 하는데 이후 조조의 행보나 성격, 사건의 개연성을 따져 보았을때

 

<세어> <잡기>의 기록이 좀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가족과 친분이 있는 사람의 말과 재산을 빼앗으려 달려든다는게 상식적으로 좀..산적도 아니고..
그리고 이때 조조는 도망자 신분이었는데 말 외에 값나가는 재산이 뭐가 있었을지..)

 

어찌됐든 이 사건 이후 계속 도망하다 중모현 이란 곳에서 사로잡혀 구금되었는데 어찌저찌 알아보는 사람 덕분에


풀려나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진궁을 만났다는 것 역시 허구)

 

이후 동탁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여러 명사들을 각지의 태수나 주자사나 주목 등에 임명하는데

 

이때 원소도 발해태수로 임명합니다. 이 원소의 감시역으로 한복을 기주목에 임명하여 견제하게 하나 (발해는 기주에 속함)

 

당시 동군태수였던 교모가 동탁을 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을 날조해 전국 군웅들에게 뿌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을 조조가 했다는 것은 허구)


당연히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고 이 격문을 본 한복마저 대세는 원소에게 있다 판단, 동탁을 떠나 원소의 편에 붙어  

 

드디어 원소를 맹주로 하는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게 됩니다.
(당시 원소는 사세삼공을 지낸 원가의 명망 + 6년상 으로 인해 명성이 어마어마한 전국구 스타였음) 

 

이 때 조조는 사실상 지방에서 아무런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사병을 이끌 수 밖에 없었는데 이래저래 5천이라는

 

병력을 모아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게 됩니다.
(위자라는 사람이 가산을 보태주어 5천이 되긴 했지만 원래 조조가 이끌던 사병이 3천이었고 이후 2천을 더 모병한
뒤 이를 온전히 유지했던건 순전히 조조의 몫이었으므로 그의 가산이 엄청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성된 이 연합군은 낙양으로 진격하게 되는데..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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