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시리즈[1-4편] : 조조 (자작)

축구왕배춘배 작성일 18.05.16 17: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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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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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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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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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조조편 마지막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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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년의 조조. 코에이 일러스트>

 

 

<중년기 - 적벽대전>
208년 1월, 조조는 업으로 귀환하자마자 현무지를 파서 수군을 조련합니다.


더 늙기전에 서둘러 천하통일을 자신의 대에서 자신의 손으로 완수하고 싶었겠죠.


그리고 그해 8월이 되자 대군을 이끌고 직접 형주를 정벌하러 남하했는데 마침, 정말 운좋게도 유표가 사망하게 됩니다.

(원소도 그렇고 유표도 그렇고 기가막힌 운이.. 이쯤 되면 하늘이 선택한 사나이라고 봐야됨)

 

형주의 유력 호족가문인 채씨 일족이 뒤를 봐주던 유종이 유기를 하구로 내쫓고 유표의 뒤를 이어받지만

 

별 저항조차 하지 않은채 채씨 일족의 주장을 따라 항복해 버립니다.

 

(연의에서는 유종이 채씨 부인의 아들로 유기와는 배다른 형제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둘이 친형제 사이.

 유종의 부인이 채가 였으므로 채가의 후원을 받습니다)

 

이에 유비 역시 하구로 도망가버려 순식간에 형주 역시 조조의 세력권안에 들어옵니다.

 

(조조는 형주를 바친 유종을 립서비스 형식으로다가 띄워주고 청주자사에 임명하지만, 후에 그는 손권을 보고는

 "자식을 낳는다면 손중모와 같아야지 유경승(유표)의 아들(들)은 개돼지와 같다" 라는 식으로 평을 하는데

 우리가 현재 흔히 쓰고 있는 개돼지의 유래가 바로 여기입니다..)

 

당초 전략적 목표였던 형주가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손아귀에 들어오자 조조는 목표를 바꿔

 

계속 남하해 손권과 대치하기에 이릅니다.

 

가후는 손권을 치는 것을 말렸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고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도발, 

 

이에 손권과 유비는 동맹을 맺고 조조에게 대적하자 드디어 삼국지 내의 3대 대전중 하나인 적벽대전이 발발합니다.

 

(조조는 손권에게 보낸 편지에서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는 둥 뻥카를 심하게 치지만 실제 이때 양측의 병력은

 조조군 16만 & 항복한 유표군 8만 vs 유비군 2만 & 손권군 3만 정도로, 80만 정도는 아니어도 압도적인 병력차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구심은 왜 손권은 3만 정도밖에 동원하지 못했으면서 제갈량에게

 그렇게 큰소리 쳤냐는 것인데 이는 동오 세력의 성격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동오의 세력은 손가 + 손가의 가신 + 동오지방의 호족 연합체로 이루어져 있었고 손권이 조조와 적대하기를
 결심하기 직전까지 거의 모든 동오의 신하들은 조조에게 항복하기를 청합니다.
 실제 전쟁이 발발했음에도 이 호족들은 몸을 사려 병사들을 내놓지 않았고 손권은 직할세력의 병력을 차출해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중에 2만을 주유와 정보에게 주었고 1만은 중군으로 손권 본인이 끌고 있었으므로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손권군 2만 + 유비군 2만이 다였습니다)

 

업 (하북) 에서부터 출병한 조조군은 먼거리를 행군해 왔기에 상당히 지쳐있었고 애초에 중원과 하북 출신들의

 

병사들이 대부분이라 훈련을 했다고는 하나 수전에 익숙할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풍토병까지 돌아 조조군은 상당히 고생하고 있었는데 상대하는 적조차 그저 그런 적이 아닌 유비와 주유였으니.. 

 

서로 적벽에서 진을 치고 대치하던 어느 날, 황개는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의 뜻을 보내옵니다.

 

조조는 형주를 항복을 통해 쉽게 얻었고 또한 동오내에서의 여론이 어떠한지(항복론이 우세) 정탐해 미리 알고 있었기에

 

황개의 항복을 그닥 의심하지 않습니다.


군영 내에서는 풍토병이 돌아 군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고 조조 본인도 내심 서둘러 전쟁을 빨리 끝내고

 

귀환하고 싶어했죠.


이러한 방심의 틈을 타 절묘하게 황개가 항복을 청해오자 조조는 별 의심없이 그를 받아들였는데


이는 황개의 사항계(거짓항복하는 계책)였습니다.


적벽에 밤이 찾아오자 황개는 미리 인화물질을 잔뜩 실은 배 여러척과 함께 조조 진영으로 향합니다.

 

조조군은 황개가 항복해 오는 줄 알고 경계없이 그 배들을 받아들이는데 황개는 조조 진영 가까이에 도달하자

 

배에 불을 붙이고 그대로 조조 진영으로 함선을 돌진시켜 다닥다닥 붙어있던 조조군의 배는 삽시간에

 

불이 붙어 번지기 시작합니다.


황개의 사항계(고육지책은 연의의 허구) , 화계에 당한 조조군의 함선은 모두 불타고 심지어 동남풍까지 불어

 

강기슭에 있던 군영까지 불이 옮겨 붙자 조조군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묘사에 따르면 그 불길이 하늘까지 닿았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대화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조조군은 불에 타죽은자, 뜨거움을 해소하고자 강에 뛰어들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


이 혼란한 와중에 유비와 주유군이 상륙해 조조군을 도륙내니 그야말로 아비규환.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의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조조는 퇴로까지 차단당한 채 군이 완전히 무너지자 병사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화용도를 통해

(개척된 길이 아니었음. 관우가 이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는 건 연의의 창작)


서둘러 도망치고 조인에게 남군을 맡겨 뒤를 끊게 했습니다.

 

이땐 심지어 제장들조차 서로간의 생사를 모를 정도로 연락체계가 모두 끊기는 등 엄청난 대혼란의 상황이었고

 

손유 연합군에게 조조군은 처참하게 당해, 조인은 소수의 병력만 가지고 남군에서 수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조인의 역량 덕분에 약 1년여간 손유 연합군과 대치하나 결국 주유에게 패퇴해 남군을 버리고 후퇴하게 되며

 

적벽대전은 막을 내립니다.


조조는 이 전쟁의 결과로 다 얻은 형주를 형주 북부만 남기고 대부분 잃어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죠.


이는 많은 승패를 겪었던 조조의 인생에 있어서도 유래가 없는 대참패였으며 실제 이 전투에서 패배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약 3년간 전쟁 활동을 중지하고 내정에만 치중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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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대전 상상도>

 

 

<중년기 - 마초격파>
211년이 되어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했는데 이를 본 관중의 마초와 한수는 자신들을 도모하기 위해

 

조조가 군대를 보낸다고 생각해 관중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반기를 드니 10만의 대군이 결집합니다.

(배송지 주. 실제 이정도까진 아니고 6~7만 정도로 보임)


이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출정해 마초군과 대치하게 됩니다.


조조 자신의 병력은 정예긴 했지만 그를 상대하는 관서군(마초 연합군)은 그야말로 싸움에 도가 튼 병사들로

 

매일 같이 전쟁을 겪는 아수라장을 헤쳐온 역전의 용사들이었기에 조조는 정면 싸움을 회피하고

 

그들을 어떻게든 고립시켜 패퇴시키고자 했습니다.


때마침 서황이 적절하게 계책을 올리니 그에 따라 서황을 보내 거점을 점령하고 본대를 도하 시키고 있는데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마초가 들이쳐 조조군을 박살냅니다.


이에 허저는 조조를 부축해 배에 태우고 한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화살비를 막으며 한손으론 배를 저어 겨우겨우

 

조조를 탈출시킵니다. 죽다 살아났지만 어쨌든 겨우 도하에 성공한 조조는 절기가 겨울에 접어든 점을 착안한

 

누규의 계책에 따라 얼음성벽을 만들고 (조조 엘사설) 관서군은 할 수 없이 군대를 물려 위수 지역(황하의 상류) 에서

 

다시 대치합니다. 관서군은 용맹했으나 연합군의 한계가 있었기에 마초는 어떻게든 조조와 교전을 하려하지만

 

조조는 그럴 생각이 단 1도 없었고 가후는 편지 한 장으로 이간계를 펼쳐 이들의 연합을 붕괴시킵니다.

 

연합이 무너지자 조조는 여유롭게 날짜를 정해 평원에서 마초와 회전을 벌이고 마초는 이 전투에서 패배해

 

량주로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조조 역시 타격이 없었던게 아닌 것이 전사자만 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를 당했는데

(부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

 

만약 연합군이 아닌 지휘체계가 마초에 의해 통일된 부대였다면 오히려 패하는건 조조였을 지도 모를 정도로

 

마초는 이 전투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줍니다.

 

(연의에선 마초가 가후에게 놀아나는 등 지략이 많이 딸리는 것처럼 묘사되나 실제 그의 계책과  대국을 보는 안목,

 빠른 상황 판단력 등을 보면 야전 사령관으로서 그 능력이 매우 출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함께 연합했던 다른 장군들이 지휘관으로서 평균 이하의 능력이었기에 마초 혼자서는 역부족이었을 뿐...

 조조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갔던 점, 조조가 마초의 계책을 듣고 "마초가 살아있는 한 내가 누을 자리조차 없겠구나"

 라고 발언했던 점 등은 그의 전투 역량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후 조조는 안정까지 진격해 점령한 후에야 업으로 귀환합니다.

(이 뒤에도 손권과 재기한 마초 등과 몇 차례 지지부진한 교전을 더 벌이나 일진일퇴해 큰 소득이나 손해는 없었습니다)

 

213년, 마침내 조조는 구석을 받고 위공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에 반대를 했던 순욱은 난생 처음 조조를 따라 유수구 전투(손권과의 전투)에 종군했다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합니다)

 

 

<노년기 - 한중전투>
215년, 조조는 다시 군을 이끌고 한중을 정벌하러 출정하고 장로는 한수, 저족과 함께 대항하나 격파당해

 

한수는 참수당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생각했는지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해 한중 역시

 

조조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때마침,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자 사마의는 그대로 촉을 공격할 것을 권하지만 조조는 멈출때를 알아야 한다며

 

그 말을 듣지 않고 업으로 귀환해 위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 때, 조조는 허도를 왕필에게 맡겨 감독하게 했는데 218년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왕필이 죽어버리자

 

크게 분노해 황실 관리들의 절반 이상을 숙청해 버립니다.

 

기록에 따르면 정말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로 이들을 죽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왕은 왕필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해 한(漢)의 백관들을 불러 업으로 오게 했다.
 불을 껐던 자를 왼쪽에, 끄지 않은 자를 오른쪽에 서도록 명했다.
 뭇 사람들이 불을 끈 자가 필시 무죄일 거라 생각하여 모두 왼쪽으로 붙었다.
 이에 왕이 말하길, "불 끄러 나오지 않은 자는 난을 돕지 않은 자들이고,
 불을 껐던 자가 실제로는 적(賊)이다."라 하고는 모두 죽였다."

 
 <산양공재기>

 

 

이해에 유비가 한중을 침공하고 하후연과 전투를 벌이자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군을 이끌고 다시 장안으로 출병합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장안에 계속 머물러 있었고 하후연은 결국 황충에게 참수당하며 한중을 빼앗기게 되자

 

그제서야 한중으로 출병합니다.
(이 해는 218년으로 조조의 나이 64세. 늙어서인지 판단력이 많이 녹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미 유리한 거점은 유비가 모두 차지한 상태였고 다섯 달 동안이나 전투를 벌이지만 승리하지 못해

 

전황이 어려워지자 내심 회군하고 싶어했고 여기서 '계륵' 고사가 탄생합니다.


(연의에서는 양수가 이 계륵의 뜻을 간파하자 조조가 불쾌해하며 그를 죽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그가 죽은 이유는 후계 다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조식의 두뇌로 활동하다 이 점이 조조에게 거슬려 죽은 것입니다)

 

 

<노년기 - 번성전투>
결국 장안으로 회군한 조조는 관우의 형주 침공 소식을 듣고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게 합니다.


그러나 관우는 되려 조인과 우금을 몰아붙여 우금을 포로로 잡고 방덕을 죽였으며, 조인을 포위해 형주 전체를

 

함락 시키기 직전까지 이르자 조조는 크게 두려워해 천도까지 논의할 정도였으나 사마의와 장제가 간언해 이 논의는

 

철회하고 서황에게 원군을 주어 조인을 구원하게 합니다.

 

결국 형주를 노리던 손권에 의해 뒤치기를 당한 관우는 패퇴하다 맥성에서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손권은 그 목을 조조에게로 보냅니다.

 

이에 조조는 관우와의 옛 정을 생각해 장사를 후하게 지내주었으며 얼마 안있어 조조 또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때 그의 나이 66세, 220년 1월의 일이었습니다.

 

 

 


# 조조는 비록 천하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그보다 더 강성했던 숱한 라이벌들을 꺾고 올라온 난세의

 

  강력한 군웅이었습니다. 일각에선 조조를 냉철한 전략가 혹은 법가의 화신 등으로 분석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의 행보를 살펴 보면 (서주 대학살, 복황후 시해, 장제의 처, 왕필 사건) 감정에 크게 휘둘리는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이게 큰 결점으로 작용해 스스로의 천하 통일을 막는다거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등

 

  생전, 사후에도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지만 어찌됐든 숱한 강적들을 헤치고 올라온 것은 그에게 그런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영웅의 풍모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편에 걸쳐 기술했지만 직접 군을 이끌고 친정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를 토대로 위무주 손자를 저술하는 등

 

  군략에 큰 재능이 있었던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생각해 볼 것이 초기 그와 함께 거병했던 친족 인사들 중

 

  조인을 제외하고는 특출나게 뛰어난 사령관이 없었기에 그가 군을 직접 자주 이끌었어야 했던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협천자'를 본인의 가장 큰 대의명분으로 삼았던 만큼 다른 대안이 생기는 것을 경계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뭐 조조의 속내야 어쨌든 조조는 한 평생을 전쟁터에서 살았다시피 할 정도로 많은 전쟁을 직접 수행했기에

 

  그리고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에 군략 면에서 그의 능력을 의심할 바는 없을 것입니다.
 
  내정면에서는 법가의 사상을 쫓아 법을 재정비하는 등 효율적이지만 강력하고 살벌한 통치 체제를 구축했는데

 

  이게 사실 백성들에게는 굉장히 가혹한 내용이라 일반 백성에게 그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둔전법 시행 이후 둔전민 들은 수탈에 가까운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잦은 강제이주 등으로 인해 원성이 자자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서주 대학살, 원소군 학살 마저 벌이자 이후에 민중들에게 그의 이미지는 악마 그 자체였습니다.
  (ex. 조조가 온다고 하자 10만이나 되는 형주 백성들은 유비를 따라 대거 남하)


  조조는 생전 곳곳에서 많은 반란에 시달렸는데 그의 가혹한 통치체제가 한 몫 했다고도  볼 수 있기에

 

  그의 정치력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심지어 황제가 있는 허도, 위왕부가 있는 업성에서도 반란이 일어남)

 

  조조는 문화, 예술면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이전까지의 문학과는 매우 다른 문학을 선보였으며

 

  이런 재능이 아들에게도 이어진 것인지 그의 삼남 조식은 그 후 몇백년간 (이백 출현 전까지) 중국 문학계의 거두로

 

  통하게 됩니다. 게다가 예술을 사랑했고 서예 또한 즐겨했으며 당대 패션의 선두주자일 정도로 옷을 잘 입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다재다능한 난세의 풍운아' 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이상으로 조조 편 마치겠습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편은 <유비> 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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