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게임업계 뒷이야기 - 07 "이 바닥은 지옥이야!"

J-너스 작성일 06.03.04 13:4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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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내공 : 어중간


바로 나갑니다~
이번엔 마감기간의 에피소드들입니다. 그냥 보고 즐겨주시면 감사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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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이크 지온!!!
짱공유 애니메이션 리뷰 게시판을 자주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소위 "구 건담 팬"과 "신세대 건담 팬"간의 싸움은 대단히 치열합니다. 저 역시도 구 건담 팬인지라 한 때 신세대 건담 팬들과 무던히도 싸우곤 했었지만, 뭐 이건 개인의 취향 문제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는 중입니다. 그래서 요즘엔 뭔가 건담관련 글이라면 문제가 없을만한 리플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글을 쓸려고 노력하는 중인데요..(물론 쉽지는 않더군요. 아무래도 한쪽에 너무 편애적인 입장이다 보니..)

게임 업계에선 이 '건담 팬'이란 의미가 상당히 한정됩니다. 즉 퍼스트-제타를 기반으로 해서 다른 작품 몇가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뜻하지요.
즉 뭐가 어찌됐든 퍼스트와 제타는 기본적으로 좋아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당시 기자나 필자들이 소위 2세대 오타쿠들과 같은 시기를 보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퍼스트 최고론"에 어느정도 물들어 있었다는 점과, 게임으로서는 다른 그 어떠한 건담들보다 퍼스트가 압도적으로 질적, 양적으로 많았다는 점입니다.
사실 요즘 시드 시리즈의 팬 분들이 "시드의 상업적 성공"을 가끔 이야기 하시는데 이 상업성 부분에선 감히 시드가 퍼스트를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죠. 아니 시드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건담 시리즈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현재까지 나와있는 모든 건담 게임들을 봤을 때 이 중에서 퍼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전체의 2/3에 달합니다.
게다가 그 중에서도 잘 된 게임이라고 꼽히는 작품들을 보면 그 역시 퍼스트 관련 게임들이 가장 많고, 퍼스트를 기반으로 한 외전 게임들 역시 허다하죠. 상대적으로 방영 시기가 근래여서 작품수가 적을수 밖에 없는 시드 시리즈는 둘째치고 Z나 ZZ처럼 예전 작품들의 관련게임 비중을 들어봐도 이것은 확실합니다.
아니 실질적으로 봤을 때 며칠 전 발매된 최신 건담 게임인 "클라이맥스 U.C"도 퍼스트부터 시작을 하지요(이건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시드 시리즈가 반다이에서 전략적으로 미는 상품이라면 퍼스트는 이미 "안정적인 반다이의 수입원"이 되어버린 것인데... 여기에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그러니까 아마 2001년도 였을 겁니다. 제가 게임 라인에 있을 때였는데..
당시 저는 다른 게임의 공략을 하고 있었고 제 친구중 한명이 당시 막 나온 "기동전사 건담(건담전기 로스트 워 크로니클의 전편격인 작품)"을 공략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 날 어쩌다보니 독자 분들이 몇 분 사무실로 찾아오셨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독자분들이 직접 편집부에 들려서 기자나 필자들 일하는 모습도 보고, 자기가 평소 좋아하던 기자들과 만나기도 하는 것은 늘상 있어왔던 일이기 때문에 그때까진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만...

문제는 한창 몇몇 기자들과 독자분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벌어집니다.
건담을 공략하던 친구녀석이 갑자기 TV 볼륨을 확 높여버린 겁니다.
당연히 주변에서 공략하던 필자나 독자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기자들에겐 민폐였죠.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가 볼륨을 높인 부분이 가르마 국장시에 행해진 기렌 자비의 연설 부분이었다는 점.
갑자기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필자와 기자가 벌떡 일어나서 부동자세를 취했습니다.
당연히 독자분들은 놀래서 "어, 어.."하고 있는 사이에 기렌 자비의 연설이 끝납니다.
그리고 TV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맞춰 "지크 지온!!"을 외치는 기자&필자 일동.
그 이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앉아서 자기 일보는 기자&필자 일동.

독자분들이야 어벙벙 해져 있었습니다만, 뭐 저희들에게 있어선 일상사였기 때문에 참으로 뻘줌한 하루가 되어버렸지요..

ps. 당시 왜 그러셨어요? 라는 독자분들의 질문에 "총수님께서 연설 하시는데 어찌 무엄하게 앉아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는 대답을 해 드렸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어느정도 독자분들 놀래키려는 필자들과 기자들의 장난끼도 섞여있긴 했습니다만... (뭐 이 부분에선 오타쿠라고 욕먹어도 할 말 없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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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들 정체가 뭐야!!!
그 당시 게임잡지 기자와 필자들에게 "가장 공략하기 싫은 게임은 무었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파이널 판타지나 메탈기어 솔리드 같은 대작 게임들? 아니면 세가레 이지리나 큰스님 같은 쿠소 게임들?
제가 생각하기엔(아마 거의 틀림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이 "슈퍼 로봇대전"이라고 대답을 할 겁니다.

리얼계, 슈퍼계를 나눠서 최소 2번 이상은 플레이 해야하는 번거로움, 숨겨진 요소들 때문에 한참 플레이 하다가 다시 예전 스테이지로 돌아가야 하는 허무함, 질리게 많은 캐릭터 숫자와 이 캐릭터들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어쨌든 최대한 많은 캐릭터들을 사용해 봐야 하는" 짜증, 기자나 필자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작품 싫어하는 작품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시스템상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작품도 써 봐야 하는 원통함, 어찌됐던 완벽 공략을 원하는 국내 독자들 때문에 짧은 기간내에 모든 요소들을 다 찾아야 하는 노고 등등...
진짜 한번 맡으면 질려버리게 되는 게임이 바로 슈퍼로봇 대전입니다.
유저로서 즐길때는 몰라도 공략자로서 공략해야 할 때는 진짜 눈앞이 캄캄해 지는 작품이죠.

제 경우엔 PS용 '로봇대전 알파 외전'과 PS2용 '제 2차 로봇대전 알파'를 공략했었습니다만, 정말이지 다시는 "공략"으로선 맡고싶지 않은 게임이 로봇대전 시리즈입니다.

그런데, 이 로봇대전 공략에 있어서 신화를 일군 사람들이 있었죠.

세가세턴 최후의 로봇대전인 'F'가 나왔을 때의 매거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만, 이 당시엔 솔직히 유저들보다 게임잡지 관련자들.. 즉 코어 유저들이 로봇대전을 더 좋아했죠.
거기 나오는 작품들에 대해 어느정도 알겠다, 게임 시스템 자체야 돈 쳐발라서 개조하고 정신기 팍팍 써대면 되는 게임이겠다.. 맘편하게 즐길 수 있던 게임이었으니 뭐 당연한 거겟습니다만..

문제는 이 F의 발매일이 마감 며칠 전이었다는 것이죠.
로봇대전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액플을 써서 쉽게쉽게 플레이 한다 해도 로봇대전 시리즈의 플레이 시간은 상당히 긴 편입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전투장면 스킵 기능이 없던 세턴 시절의 F라면 그 플레이 시간은 가히 막대한 편이었죠.
그런데 약 7일 정도의 시간 안에 이 게임을 "완전공략" 타이틀에 맞게 공략을 해야 했으니...

뭐 간단하게 "여유가 없으면 다음달로 넘기면 되지 않겠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게임잡지 특성상 각각 발매일이 다른 잡지라 해도 일단은 같은 'X월호'라는 타이틀을 다는데, 월호 수가 같은데도 타 잡지에는 실리고 매거진에선 다음달로 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게 문제였던 것이죠.
그렇다고 다른 잡지들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모르겠는데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던(제 기억이 맞으면 그 당시 매거진 발행일이 25일이었는데, 다른 잡지는 각각 다음달 1일, 5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다른 잡지들은 저희보다 5일에서 10일 정도 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책이 나왓을 때는 같은 월호가 되어버리는 것..) 다른 잡지에 비했을 때 매거진은 말 그래도 "치명적 위기상황"이 됐던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치명적이었던 것은, 로봇대전 시리즈를 맡을만한 필자들 중 상당수가(저는 그 당시 경력이 일천하던 때였기 때문에 로봇대전 맡을 엄두를 못냈죠) 다른 게임 공략에 매달려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죠. 애초 생각했던 것 보다 공략에 시간을 더 잡아먹다 보니 "XX일까지 먼저맡은 게임 공략을 끝내고 로봇대전 공략에 돌입한다"라는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로봇대전 같은 게임을 대기중인 예비필자들에게 돌릴 수도 없고(예비 필자들은 말 그대로 긴급시에 투입되는 특정 장르 전문가들, 또는 상대적으로 주력필자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B급 필자들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주력 예비필자들이 대부분 RPG전담들이다 보니 시뮬레이션인 로봇대전 맡을 필자들이 모자랐던 거죠), 그렇다고 공략을 안 할수도 없고...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였는데...

"우리가 맡겠다!"라고 나선 분들이 있었으니 원래 로봇대전 공략을 위해 대기중이던 송찬용 기자님(필명 세라송)과 당시 디자인팀 팀장님, TRPG담당 기자님, PC쪽 기자님 한분, 이렇게 총 4명의 용사들...
송기자님이야 원래부터 로봇대전 맡기로 되어있던 분이니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보드게임이나 마찬가지인 TRPG담당 기자님과 게임과는 전혀 무관한 디자인팀(매킨토시를 이용해 책의 구성을 전담하는)의 팀장님까지 나서신 것은 저희로선 놀랄 노자였지요.
그래도 맡길 사람이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이 분들께 맡겼는데....

그 장면을 본 4일 후, 드디어 제 담당게임을 끝내고 원고 들고 회사 찾아가 봤더니 디자인팀에서 로봇대전 원고가 다 끝나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야? 4일만에 로봇대전을 끝냈다고?!"
라는 생각에 공략 담당했던 분들을 찾아보니... 이건 완전히 좀비군단이 따로 없더군요.
시커멓게 죽은 얼굴에 축 늘어져서는 "세상이 망해도 난 자야겠다"라는 얼굴로 쓰러져 있는 모습들을 보니 정말 할말이 없어지더라는...
참고로 저 역시 2차 로봇대전 공략시 루트 나눠서 4명이서 공략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이 당시에도 약 20일 가까운 시간이 걸렸었습니다.
뭐 늘어난 볼륨을 감안 하더라도 4일만에 공략 다 끝내고 원고까지 다 써냈다는 것은 정말이지 경천동지할 일이었던 거죠.
아마 이 때의 "4일만에 공략 완료 및 원고탈고"라는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 아닐까 생각 중입니다.

ps. 그리고 이 당시 잠에서 깨어난 공략자 4분이 이구동성으로 외친 말이 "내 다시한번 로봇대전 공략을 맡으면 성을 갈겠다!" 였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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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잡지냐 신문이냐?
위에 디자인팀 이야기가 나왔으니 디자인팀 에피소드도 하나..
책을 보시는 독자분들은 그저 글 내용에 신경을 쓰실 테니 기자나 필자들의 이름은 잘 아시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한때 "게임잡지 기자"라는 직업을 대표하는 대명사였던 "정태룡"기자라던가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게임잡지 디자인 팀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이 디자인 팀이 하는 일은 어떻게 하면 더 보기좋게, 그리고 깔끔하게 잡지를 구성하는가 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이 디자인팀이 허접하면 책으로 나왔을 때 공략이 허접해 보이기도 하고, 허접쓰레기같은 공략이라도 이 디자인팀이 잘 만들어 주면 최소한 중간은 가는 공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디자인팀의 역량이란 것은 정말 중요한 요소입니다.

보통 하나의 공략을 맡을 때 필자들은 최초에 정해진 페이지에 맞춰 글을 써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필자의 능력이나 게임 자체의 요소들 때문에 정해진 분량보다 적거나 또는 반대로 많은 분량의 글을 써 오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보통 생각하기엔 글을 더 쓰거나 아니면 줄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진짜 아닌 말로 "이 게임은 죽어도 이 이상의 글은 쓸 수 없다" 또는 "이 게임을 제대로 공략할려면 이 이하로 글을 줄일 순 없다"라는 경우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다른 필자에게 남는 페이지를 넘기거나 열심히 공략하는 다른 필자의 페이지를 뺏어올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럴때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디자인팀이죠.
페이지 수에 비해 글이 적다, 싶으면 글 포인트를 늘리고 사진과 여백간의 조화를 맞춰 깔끔하고 보기 좋은 책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페이지 수에 비해 글이 많으면 사진 크기와 포인트를 조정하고, 문단의 단 수를 나누면서도 여백 조정을 해서 절대 빽빽하다는 느낌을 안주게 만들수도 있지요.
어쨌든 글만 써재끼는 저희로서는 이렇게 능력있는 디자이너 분들은 거의 마술사로 보일 정도입니다. 덕분에 능력있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정말 글 쓰기 편해지고, 디자이너 능력이 형편 없으면 고생만 디립다 하게 되지요.
모 잡지에서 일할때는 떨렁 4줄 넘친다고 글 짤라오라고 구박을 해 대는 디자이너도 있었습니다(사진 크기만 조금 조절해도 충분히 다 들어가는 양인데 그걸 짤라오라니.. 나 능력 없소~라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런 디자이너분들 중에서도 정말 괴물같은 분이 한분 계셨으니...

제 후배중 한명은 일명 "폭주원고" 써오기로 유명한 녀석이 있습니다.
공략하다 한번 삘 받으면 정말 끝간데 없이 글을 써오는데, 예정된 분량의 2배를 훨씬 넘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당시 게임잡지 한 페이지를 구성하는 글의 양은 아래한글 기준으로 1.5페이지 정도. 글의 여백이 많다면 2페이지 정도였습니다. 사진은 일반적으로 4~6장 정도가 들어갈 때 기준입니다만..
즉 책으로 30페이지 정도의 글이라면 실제 필자가 써오는 분량은 아래한글 기준으로 액 45~50페이지 정도. 사진은 대충 100장 전후가 된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이 후배녀석, 24페이지 짜리 RPG게임의 공략이었는데 아래한글 90여페이지에 240장의 사진을 찍어와 버린 겁니다. 게다가 이 친구, 폰트 크기도 기준 10포인트인데 9로 줄이고, 문단 간격도 110이 기준인데 100으로 해서 써 온겁니다. 원고 기준치로 바꾸면 약 130페이지 분량.
대충 잡지기준 50페이지 분량의 글을 써 온 것이죠.

얼마나 글 양이 빽빽했으면 담당기자와 팀장님이 원고 교정보다가 포기를 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것이죠 뭐. 그렇다고 다른 필자에게서 페이지 끌어오자니 그 달엔 대작게임은 좀 적어도 수작 수준의 게임들이 워낙에 많던 달이라 페이지 자체가 빠듯하던 실정이라 도데체 뺄 수 있는 페이지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이 후배녀석, "이걸 다시 써 말어..."라는 고민에 쌓인 채 밤에 잠이 들었습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기자들과 페이지 조절 문제로 상의를 하는데...

갑자기 디자인팀의 에이스인 누님께서 나타나시더니 하시는 말씀.
"야, 여백 모자라니까 사진 더 찍어서 줘"
"..... 예???"

당황해서 물어보니, 그 전날 양이 너무 많아서 교정보다 포기하고 놔 둔 원고를 이 누님께서 모르고 가져가셔선 디자인 작업을 하신 거라더군요. 그런데, 사진을 더 찍어서 달라는 말이 걸린거죠.

"누나, 그거 양이 장난 아닐텐데 어떻게 했길래 사진이 모잘라요?"
"직접 볼래?"

씨익 웃으면서 후배를 자기 컴 앞으로 끌고 간 누님이 보여준 화면은....
24페이지 안에 130페이지 분량의 글을 꾸겨넣고 꾸겨넣은 황당무계한 화면이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보기 흉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글자 폰트가 평균보다 한참 작고 여백이 좀 좁아보일 정도 빽빽한 글이긴 했지만 보기엔 전혀 지장없는 수준.
그렇게 꾸겨넣고 나니 되려 여백이 남아 있더군요.

"이 여백이 애매해서 말야. 글자 폰트 늘이면 바로 오버해 버릴테고, 글을 더 써 달래기엔 좀 많고 해서 사진 두어장만 찍어주면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살짝 미소지으며 말하시는 이 누님을 보고 제 후배녀석은 딱 한마디만 남겼습니다.
"괴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히유~ 대단한 누님이셨구만.."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제가 군대를 막 제대하고 일자리를 찾고 있을 때, 다른 후배 녀석이 공략을 하는데 일손 모자라다고 저에게 SOS를 때렸습니다. 당시엔 게임 매거진 돌아가기 전에 감각이나 되찾아보자라고 생각을 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는데, 그게 실수였지요.

그 때 맡은 게임이 SD건담 G제네레이션 F였는데, 그 때 저희들에게 주어진 페이지는 42페이지(그것도 본지 기준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공략단행본 기준. 즉 평소보다 훨씬 작은 분량입니다). 이 페이지 수는 전작인 "제로"때를 기준으로 한 건데...

플레이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G제로와 GGF의 볼륨 양은 천지차입니다. 단순 계산으로도 두배, 실질적 분량으로 따지면 거의 3배 가까운 분량 차이가 나는데 전작에 맞춘 페이지를 할당해 줬으니 뭔가 될 리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나 그 후배 녀석이나 "건담"이라고 하면 나름대로 빠삭하다고 자만하던 녀석들인지라 쓰고싶은 내용은 많은데 페이지가 한도끝도 없이 모자라던 상황이었죠.

어떻게든 줄이고 줄여서 가져가 봤습니다만 저와 후배녀석이 써 간 페이지 수를 합치니 아래한글로 190페이지가 나오더군요. 평소보다 작은 책에 42페이지 분량으론 오버도 그런 오버가 없었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그 이상으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줄이고 줄이고 또 줄였더니 어찌어찌 140페이지 분량까진 줄일 수 있겠더군요.

여기서 어떻게 공략내용을 부실하게 하지 않고 글을 줄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있는데 들려온 청천벽력같은 소리가 "다른 공략자가 원해서 4페이지 그쪽으로 떼어줬다. 그러니까 너희는 38페이지 분량에 맞춰 줘"라는 거였죠.
아니 42페이지에 한 10페이지 정도 더 얹어줘도 모자랄 판에 페이지를 더 뜯어가다니!! 장난하십니까아아아~~~ 라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항의를 해 보았지만 씨도 안먹히더군요.
(당시 저희 페이지를 뺏어간 분이 주력 기자중 한분이신데다 워낙 영향력이 막강했던 분인지라 손 쓸 도리가 없더군요. 게다가 나중에 책이 나왔을 때 보니 저희 페이지를 뺏어가신 분의 공략은 말 그대로 "여백의 미가 폴폴 풍기는" 넉넉하디 넉넉한 기사. 진짜 입에서 욕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완전히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탈력 100%라 둘이서 한숨 푹푹 쉬면서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만 반복하고 있는데, 여기서 다시 등장하신 그 디자이너 누님께서 왈.

"예들아. 힘든 건 알지만 교정은 확실히 봐 줘야 할 것 아니니?"
"... 예???"

무슨 일인가 알아봤더니, 교정은 커녕 글 내용을 줄여야 할 판이라 3교째로 뽑아두었던 원고를 덥석 집어가신 이 누님께서 다시 디자인 작업을 끝마치고, 손수 교정까지 봐 주신 상태였다는 거였죠.
그것도 줄어든 페이지 수에 맞춰서.
그 대단하신 누님도 폭주하는 원고량을 조절하기 힘드셔서 사진 분량이 한참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130페이지가 넘어가는 분량의 글을 그 원고 안에 다 때려박은 모습을 직접 보고나니 정말 할말 없더군요.
누님 대단하십니다요~~~ 라는 말 밖에 뭐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른 후배에게 이야기로 들었을 때 보다 제가 직접 당해보니 그 충격은 진짜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지요.

그 덕분인지, 이후로는 글 잘쓰는 기자나 필자분들 보다 실력있는 디자이너분들이 더 존경스럽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ps. 그리고 그 때문에 나중에 생고생 했죠. 모 잡지에 있을 때 디자이너팀이 하나같이 실력이 개판 오분전이라.. (실력 자체는 있는데, 다른 장르의 잡지를 주로하시던 분들이라 이런 원고량 조절을 전혀 못해서 진짜 툭하면 디자인팀과 싸우곤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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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부장님 부장님 우리 부장님~
제가 게임잡지업계에서 일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분을 꼽으라면 최수만 이사님을 듭니다.
예전 게임월드 기자로 출발하셔서 게임매거진 팀장, 차장, 부장, 이사를 거쳐서 현재엔 게임 와이드란 홍보업체 사장을 맡고계신 분인데요(그래서 지금은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게임매거진 출신자들이 아직도 매거진 당시 직책으로 부르곤 합니다).

기자, 필자, 디자인팀과 함께 철야작업을 하시면서 어떨때는 딱딱해진 공기를 팍 풀어주시고, 모두들 힘들어 할 때 이런저런 행동으로 풀어주시기도 하시고, 무슨 일이 생기면 앞장서서 처리해 주시니 좋아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분이죠.

예전에 잡지사 기자들 모임때 우연히 게임매거진 출신 기자들이 꽤 많이 모인적이 있는데, 그 때에도 "만약 최이사님이 다시 게임회사를 차려서 우리를 부르신다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에 전원 이구동성으로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달려가야지"라고 주저없이 대답할 정도였다면 이분의 인기가 이해가 가실려나요? 현재에는 다른 잡지사나 웹진에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있는 분들이었음에도 그런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뭐...

어쨌든 그런 최이사님은 여러 전설도 남기셨는데요, 아직까지도 하나 깨어지지 않는 전설이 "격투필진 초토화 사건".
그 당시 각 게임잡지사들의 평가 중 하나가 "게임 매거진은 TRPG분야와 기획기사, 그리고 격투게임 공략에 강하다"였습니다.
전통적으로 게임 매거진엔 격투게임 강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격투게임 공략도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또 격투게임 필진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지요.

그런데 어느날, 업소에서 기판을 빌려와서 공략에 열중하던 격투필자들 사이에 최이사님이 슬쩍 끼어드셨습니다.

"어, 이게 이번에 공략할 게임이야? 어때 괜찮냐?"
"생각보단 좋아요. 기술이 확실하게 들어가 주고, 타이밍도 괜찮네요"

같은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가다가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최이사님, 갑자기 본인이 플레이를 해 보겠다고 나서신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솔로 플레이가 아니라 당시 최강이던 매거진 격투필진들을 상대로한 대결을 청하신 거죠.
필진들 입장에서야 이사님이 게임 좋아하시는 거 아니까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는데...

당연히 실력차가 있으니까 필진들이 압승을 거두긴 했습니다만 문제는 전원이 1패씩은 꼭 안고 갔다는 점. 무었보다도 그 1패를 할 때의 기술들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이사님의 플레이 방식은 전형적인 "비비고 돌리기". 즉 되는대로 스틱 휘드르고 버튼 퍽퍽 눌러대는 방식이었는데, 이게 모든 필진들을 당황스럽게 하더라는 거였습니다.

그 당시 직접 대전했던 후배녀석의 말을 빌리자면 "그 때 이사님 나가신 후 이사님이 해 내신 콤보를 재현할려고 전원이 달라붙었는데 도저히 재현 불가더라"였죠.
즉 이사님께서 어떻게 비비고 돌리다가 나온 기술들이 진짜 절묘하고 예술적인 콤보로 연결이 된 것이었다는 거죠.
게다가 그것이 일반인들은 물론 격투게임이라면 이골이 난 전문필진들도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거야?"라고 경악할 정도의 환상적인 콤보가 탄생한 겁니다.

당시 격투필진들 중 가장 막내였던 김경문 기자의 경우, 캐릭터가 움직이는 모션을 보면서 애니메이션 프레림 수까지 맞추고 그 프레임에 맞춰 기술을 걸거나 캔슬을 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포기 포기! 이사님 콤보는 도저히 안되"라고 두손 들어버렸고, 김기자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다른 필자들이나 당시 격투게임 당당기자였던 헬하운드 기자 역시 "대체 이사님 손은 어떻게 된 손이야?!"라며 경악을 했더랬죠.

그 이후, 가끔씩 신작 격투게임이 나올때 마다 은근슬쩍 이사님이 끼어들어서 역시나 그 특유의 "비비고 돌리기"로 괴이막측한 콤보를 만들어 격투필진을 패닉상태로 몰아넣다 보니, 매거진에선 소위 "귀동아빠 콤보"로 불리우는 그 기술들은 가히 전설로 남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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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 줄여야 할텐데.... 어쨌든 다음회에도 잡지사 기자들의 에피소드 묶어서 갑니다아~~

ps. 보시는 분들은 재미 없으실것 같지만, 글 쓰는 제 입장에선 갑자기 옛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쓸데없이 기분이 좋아져서 오버를 해 버렸습니다.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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