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 소문의 벽 中

미친존재감 작성일 14.09.28 01: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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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저는 어머니와 함께 단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데 밤중쯤 되지 느닷없이 밖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났고, 어머니와 저는 그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말았어요. 눈을 뜨자마자 백지 창문이 덜컹 열리면서 눈부신 손전등불빛이 가득히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어요.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한 불빛이었지요. 한데 그 불빛 뒤에서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만 울려오는 것이었어요. 이 집은 남자들이 모조리 어딜 갔어, 남자들은 다 어딜 가고 꼬맹이하고 아주머니만 남아 있는 거야, 그런 소리였어요.. 올 것이 왔구나 싶었습니다. 전 속이 떨려 감히 그 불빛을 쳐다볼 수도 없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저보다도 더 기가 질려 보린 모양이었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애원하듯 간신히 대답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는 원래 다른 남자가 없고 식구가 두 사람뿐이라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전짓불은 곧이를 들으려 하지 않더군요. 거짓말 마라, 우린 다 알구 왔다, 남자들은 다 어딜 갔느냐, 누굴 따라간 게 틀림없는데, 따라간 사람들이 누구 편이냐는 것이었지요. 무섭고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짓불의 추궁대로 아버지는 정말로 밤이 두려워 집을 비우고 달아나고 없었으니까요. 전짓불은 정말 그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전짓불의 정체만 알 수 있었다면 물론 대답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 전짓불의 강한 불빛 때문에 그 뒤에 선 사람이 어느 편인지는 죽어도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그 전짓불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무서운 것이었는가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군요.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어머니는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요. 전짓불이 자꾸 대답을 강요했기 때문이죠. 어머니는 결국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가 밤새 어디론가 집을 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누굴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세상이 시끄러워 잠시 피신을 해간 것뿐이니 용서를 해달라구요. 


그러나 진짓불은 믿질 않더군요. 거짓말이다, 당신의 남편은 누굴 따라간 게 틀림없다, 그게 어느 편이냐, 아주머니는 누구 편이냐, 사정없이 추궁을 하고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머니는 다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농사나 지어먹는 사람이다, 누구를 따라간 일도 없고 누구의 편이 된 일도 없다, 무식한 죄로 그러는 것이니 제발 허물을 삼지 말아 달라…… 


이 아주머니 정말 반동이구먼, 누구의 편이 아니라니 그런 반동적인 사상은 용서할 수 없다, 전짓불 뒤에서 비로소 그런 소리가 들려 왔어요. 겨우 전짓불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어요. 우리들이 만약 보잘 것 없는 한 늙은이나 나어린 꼬마둥이가 아니었더라며 절대 전짓불의 용서를 받을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다행히 장정한 남정네가 아니었어요. 


리고 늦게나마 정체를 알아낸 어머니의 애원으로 우리는 겨우 화를 면할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날 밤 사이 마을에는 또 많은 새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었어요. 끔찍스런 전짓불의 강요에 못 이겨 그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를 점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었지요. 사람들은 좀처럼 그 전짓불의 정체를 알아맞힐 수가 없었던 거예요…….




오늘 그것이 알고싶다 보고나서 불현듯 생각나서 올려봅니다벌써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정독해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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