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망상의 둥지-0008 바이탈싸인(3)완

NEOKIDS 작성일 06.09.04 01: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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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중 환자의 깨어있음과 우리들의 안전, 그것들의 무게를 재면서 멍하니 걷다가 나는 문득 김호중 환자의 물건이 담긴 가방을 가지고 오는 걸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몸을 돌려 캐비넷을 열고, 그것을 꺼내면서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가 더 무거워지는 듯 했다.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다시 생각에 잠긴 채 걷고 있었다. 정신병동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몇 분을 생각에 잠겨 걸어갔을까. 나는 내 옆에 멀뚱히 있던 것에 다리를 부딪혔다.

“이건.....”

파란 색의 카트에 담겨있는 그것은 누군가의 집도가 끝난 후 나온 쓰레기 더미들이었다. 피가 묻은 장갑, 잘라낸 적출부위, 고름 등등이 뒤섞여 있는 그런 것들. 그리고 그 옆에 놓여진, 집도하고 쓸모없어 버려진 메스와 메스자루들. 나는 순간 주위에 누가 있는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것을 책임지는 사람은 그 자리에 없는 듯 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이쪽에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내려놓고 나는 가만히 그 비닐을 찢었다. 그리고 이미 집도에 사용하기에는 날이 무뎌져 버린 메스 날과 자루를 가만히 챙겼다. 가지고 있던 종이 서류 같은 것으로 가만히 그것들을 감싸고는 주머니에 넣은 채로 꼭 쥐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 나는 가방을 들고서는 재빨리 그 곳을 벗어났다.

정신병동에 들어서기 전의 모퉁이에서 나는 잠시 멈춰섰다. 정신병동 격리실에 가려면 근무하고 있던 병동을 나와서 별채처럼 마련된 곳으로 가야했기에 이미 바깥의 공기를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이미 찌는 듯한 여름이 마무리되고 스산하기까지 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 그 가을의 햇빛이 아무리 눈을 감아도 내 눈꺼풀을 투과해 들어왔다. 강렬한 햇빛을 느끼면서 나는 다시 조용히 한숨을 지었다. 메스를 메스 자루에 끼우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걸로 되는 걸지도, 그래. 이러면 되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마음의 한구석에선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 한다는 무거움은 여전히 깊게 도사린 채 나를 누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뭐 어때! 이미 죽은 사람이잖아! 산 사람이 더 중요한 거 아냐?’

나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는 정신병동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어렵사리 맘먹은 그것이 지워지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김호중 환자는 날 보면서 웃었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가방을 보았다.

“정말 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흔들리면 안 된다. 나는 가방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의 눈길을 피했다.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신 것도 고마운데......정말 감사합니다. 갑자기 병실도 옮겨주셔서 놀랬습니다. 하지만 착한사람들도 많고, 무엇보다 제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니 말하기도 편해서 오히려 배려해주신 것 같더군요. 감사합니다.”
“......”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벌쭉벌쭉 웃는 그에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방을 건네주었다. 김호중 환자는 그 속에 자신이 뭔가 놓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푹 빠져 가방을 열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물건들에 관심을 쏟아. 제발. 내가 당신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면서 목을 그을 수 있게. 그는 가방을 열고 물건들을 자신의 앞에 쏟았다. 그리고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그 물건들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기회는 이 상황에서 더도 덜도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긋이 주머니 속의 종이를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메스. 좀 차가운 금속성 자루의 느낌이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왔다. 그리고 잠깐 후, 내 손은 주머니에서 메스를 꽉 쥔 채 이미 나와 있었다. 한 팔로 머리를 잡고 메스를 그은 다음 뼈 째 뜯어내는 거야. 예전 해부 때도 많이 해봤잖아. 쉬운 거야. 뼈 톱은 없어도 척추까지는 딸려 나오게 할 수 있어..... 쉬운 거라고. 그는 아직 물건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어. 지금이야. 해치워야 해. 해치워야.......

땡그랑거리는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내 손이 메스를 놓쳐서 난 소리였다. 김호중 환자는 깜짝 놀란 듯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나는.....못하겠습니다.......”
“서.....선생님......”
“크흑.....”

잠시 후, 그는 모든 자초지종을 나에게서 듣고 침울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런 바이탈 싸인이 없으니 체액조차 생성될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다. 확실했다. 그는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살인자가 아니다.

“그럼....이제 사흘 밖에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도, 그것도 다른 사람들 모르게 처리할 겁니다. 야심한 밤에나 그렇게 할 것 같아요.”
“........”

나의 대답에 그는 다시금 말이 없어졌다. 누구든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이제까지 숱하게 해왔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사흘뿐이라면..... 하지만 그는 어느새 다시 물건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더욱 급한 표정과 손짓으로. 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았다. 안식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를 찾는 심정.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심정.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더욱 애처로움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역시 위험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애처로운 행동은 무언가를 발견하더니 그쳤다. 가만히 손에 쥐고 들여다보고 있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그걸 훔쳐보았다.

“역시 그거였던 겁니까?”

한정희와 이상한 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들고, 그는 한참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도 이젠 더 흘리지 않았다. 김호중 환자의 표정이 왠지 밝아지는 듯 했다.
“이제, 이걸로 된 겁니다. 찾았습니다. 선생님도 이제 이걸로 괜찮을 겁니다.”

그를 부축하면서 계속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아무도 모르게 병실을 데리고 나와서 공중전화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휠체어에 태우고 마스크를 씌웠다. 왠지 모르게 그는 내 핸드폰을 써도 되는데 굳이 공중전화를 써야겠다고 고집하면서 나를 닦달했다. 만약 이게 그의 소원이라면, 그래서 다시 코마상태가 된다면 못해줄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그 메모지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하지만 나는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 무진장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충기였다. 나는 박충기에게 조심스레 손짓을 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고, 즉시 내게로 달려왔다.

“뭐하시는 겁니까? 선배.”
“이 사람, 김호중 환자야.”
“예? 아니 그럼.....”
“잔말 말고 나 좀 도와줘.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는 길이야.”

외진 곳의 공중전화 박스 근처에는 다행히 사람이 없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번호를 누르고 있었고, 나는 그가 주의를 끌지 않도록 좀 떨어진 곳에서 박충기와 함께 망을 보고 있었다. 아까 메스를 챙길 때보다 더 심장이 뛰고 편치가 않았다. 박충기는 그런 나를 지긋이 쳐다보았다.

“선배, 이게 무슨 일인지 좀 설명이나 해주세요.”
“과장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

그리고는 그동안의 이야기를 박충기에게 설명했다. 메스를 들고 그를 죽이려 했던 과정까지 모두 다. 박충기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다 듣고 난 박충기는 말을 꺼냈다.

“그럼 선배는 저 김호중 환자를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어떻게 하긴. 이대로 둘 수는 없어. 만약 저걸로도 안 되면, 그 때는.....”
“그 때는요?”
“여기서 어떻게든 내보내야지.”
“......”

박충기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가 인상을 쓰고 있는 것도 같고 웃기도 하는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뭐야, 충기씨. 왜 그래?”
“선배, 죄송합니다.”

그는 의사가운의 주머니 속에서 펼쳐진 폴더형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는 표시된 카운터가 계속 깜박이고 있었다. 수신자는 원장의 핸드폰 번호였다.

“처음엔 선배가 김호중 환자를 빼돌리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취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허무맹랑하군요. 어쨌건 선배랑 저 환자 둘을 상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원장한테 도움을 청한 겁니다.”
“아.....아니.....넌......”
“선배가 제대로 끝내주셨다면, 선배도 원장파로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요.”
그는 마치, 미안하다는 듯 살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 선배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됐습니다. 곧 경비가 달려올 겁니다. 그런 얘기까지 해드렸으면 제대로 하셨어야죠. 그 기자한테 정신병자라고 얼마나 애둘러서 말을 해야 했는지 선배는 모르실 거에요. 그 놈이 맥도 짚어 봤더라고요. 그래도 전 제대로 다 조치했는데, 선배는 이게 뭡니까.”
“너.....이 개자식......”
“어차피 다 늦었습니다. 멀리는 도망 못 가실 테니 그냥 저랑 계시죠. 김호중 환자는 제가 알아서 처리 하겠습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하고는 김호중 환자에게 다가갔다. 김호중 환자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은 뒤부터 계속 수화기를 잡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마지막 희망이자 도박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박충기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도 반항을 했다. 그와 나의 몸싸움이 벌어졌고, 그는 계속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저 쪽에서 경비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정신병동의 남자 간호원들까지 합세해 있었다.

몸싸움은 중단되었다. 내 팔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나는 불에 덴 것 같은 강렬한 통증과 함께, 그 통증을 안겨준 도구를 내 손으로 빼냈다. 그건 아까 전에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워넣었던 그 메스였다. 피가 계속 옷을 적시고 있었다. 박충기가 당황해서 내 팔을 붙잡고 부축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경비원들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박충기의 부축에도 아랑곳없이 바닥에 누웠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가운데, 경비원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김호중 환자에게도 다가갔다. 나는 팔을 뻗어 그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그건 내 희망사항이었을 뿐이었다. 뻗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 사람들의 사이로 김호중 환자가 전화를 끊고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낸 소리는 내 의식과 그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그 때 내가 마지막으로 본 김호중 환자의 입모양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툭 떨구어 졌다. 그의 그런 움직임과 내 상황에 놀란 사람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들, 하얘지는 공간. 그리고 박충기의 얼굴. 내 피. 내 정신은 검은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나는 그 일이 있은 지 한 달 후, 사표를 냈다. 알고 보니 박충기는 원장의 친척이었다. 그동안 계속 비밀로 하고 있었기에 다른 동료 의사들조차 전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와 박충기의 사건은 경찰이 개입하지 않은 선에서 무마되었다. 그런 박충기와, 그런 원장과, 그런 더러운 사실들을 알면서도 넉살좋게 그 곳에서 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홀가분해지고 나서는 전부터 꿈꿨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외딴 곳의 진료소 같은, 의료봉사자. 내가 대학생 때 했던 일 치고는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일. 지금은 그렇게 많은 돈을 벌지도 않는다. 또 어차피 가족도 없이 혼자였으니까, 그다지 어려울 일도 없었다. 그렇게 진료소에 온 게 꽤 시간이 지났다.

김호중 환자는 상태가 좀 나아져서 사표를 내기 전, 확실히 상태를 내 손으로 체크해봤다. 그는 그 전화를 건 이후 다시 무의식상태로 돌아갔다. 이제는 진짜 엄연한 시체가 된 것이었다. 내 사비를 들여 화장을 해주기 전에, 나는 시체가 된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것으로 인해 그렇게 살아있었는지, 또 그가 전화한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깨어나 있었는지도, 여전히 알지 못했다. 그가 남긴 모든 세포조직들은 그의 의식이 떠나는 동시에 폐사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끝났고, 나는 여기 와있다. 그리고 여기엔 정겨운 사람들이 내 마음의 상처들을 치료해주고 있었다.

또 다시 하루가 밝았고, 나는 또 의료도구들을 부지런히 챙겨 길을 나서려고 일찍 일어났다. 해가 뜨고 있었고, 해는 내 진료소의 문 앞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준비물을 다 챙긴 나는 진료소의 나무로 짠 유리 미닫이문을 보면서 상쾌한 기분에 나직이 말했다.

“오늘도 좋은 날씨겠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문이 열렸다. 그 문을 열고 진료소 안으로 들어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존재 때문에 나는 진료가방을 손에서 떨어뜨려 버렸다. 말쑥한 정장에 약간 긴 바바리코트를 입은, 김호중 환자가 내 앞에 서 있었던 때문이다.

“아.....아니.....어떻게.....”
“아, 저, 놀라지 마십시오. 선생님.”

커피의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를 마주하고 있다. 그는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 존재가 무엇이 되었는지는 알겠더군요. 저는 이 곳에 있으면서도 이 곳에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내가 미간을 찡그리자, 그는 다시 설명을 할 말을 찾아내려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어떤 사람은 저를 천사라고 부르기도 하고......어떤 사람은 저를 악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영체가 된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뭐 하여간 도움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저는 모습을 드러내고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해가 잘 가지는 않지만.....어쨌든 건강해 보이는 군요.”
“선생님 덕이죠.”
“그럼 좀 이야기를 해주시죠. 어떻게 된 건지.”
“그러니까, 제가 기억을 아직 가지고 있는게......아. 그 공중전화 앞이군요.”
“그랬었죠. 나는 그 때 상처를 입었고....”

그는 자신의 이야기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서 자신의 전생을 말했다.

“전 고아였습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는 그런 인생이었죠. 사람들은 제가 고아라고 하는 순간부터 모든 의심과 편견을 갖더군요. 그래도 전 의미를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괴롭고, 또 외로웠죠. 어느 순간 저는 자살을 결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약을 많이 먹었죠. 그렇게 방에서 괴로워하면서 죽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절 도왔습니다. 그리고는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계속 말을 해줬죠. 너의 존재는 이렇게 되라고 생겨난 게 절대로 아니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간호도 충분히 해주었고요. 그 사람이 제게 남긴 쪽지가 그것이었습니다.”
“아....그 이상한 번호.....”
“예. 이젠 다시 걸어도 받지는 않겠지만요.”

그는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아주, 끝까지 살려고 발버둥 쳤을 때, 그 전화로 걸면 내가 받을 것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저는 그 약이 투여되고, 심장의 근육들이 마비되는 순간에도 끝까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대로요. 그리고 어느 날, 그렇게 시체가 된 채로 깨어난 거죠. 아마도 그건, 이 단계로 오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럼 전화통화는 또 대체?”
“아주 많은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다는 기억이 나지 않네요. 다만 그것만은 기억나는군요. 이제 되었다, 편히 쉬어라,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전 눈을 감은 거구요.”
“그럼 그 전화 너머의 사람은......”
“아마도....사람은 아니었겠죠.”

커피 잔은 비워졌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언제나 또 보게 될까요?”
“그건 선생님이 정말 힘들어서 도움을 청할 때나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그 때가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이 안 드네요.”
그는 내게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지금 어느 때보다 행복해보이니까요.”

그는 그 미소와 함께 햇빛 사이로 사라져갔다. 한 팔은 내게 안녕의 표시를 하기 위해 흔드는 채로. 나는 그 뒷모습을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새 햇빛이 그의 모습을 삼켰을 때, 나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진료가방을 다시 집어 들어 문을 나섰다. 햇빛과, 그 사이로 실려 오는 공기의 내음이 더없이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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