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 장료전

건모2 작성일 09.11.04 02: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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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마지막, 귀신 장문원이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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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張遼) 자는 문원(文遠)

 

  삼국지연의만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촉한정통론의 영향을 받아, 혹은 '인덕'이라 불리는 천하인의 그릇에 반해 촉한의 장수들을 좋아하고 위나라의 장수를 적대시하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모든 일엔 예외없는 법칙이 없다고, 위나라 가운데에서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장수가 있으니, 그 중 우선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장수는 단연 장문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사실 그래봤자 2등 서황이 끝)

 

  삼국지연의에선 관공에 위해 부각되거나 이미지가 깍이는 장수들이 상당히 많은데, 장료는 득과 실을 동시에 본 유일한 장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연에서 관공과 형,아우 하는 사이가 되는 바람에 위나라에서 손꼽히는 무용이 있어도, 어지간한 모사에 버금가는 지략과 강단이 있어도, 무예에 있어선 용장 장비의 두수 쯤 아래고, 지모에 있어선 자룡에 비할바 못되며, 충성에 있어선 관공의 오마주로 여겨지는 장문원.

 

  허나 장료는 인재제일 주의의 위군에서, 그것도 항복한 장수의 신분으로 친족인 조씨와 하후씨를 제외하고 연봉 탑3에 들어갈 정도의 공훈을 세운 명장중의 명장이다. 아니, 개인적으로 삼국지 3대 무장을 뽑으라면 그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만한 장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우, 장료, 조인)

 

  기백의 전장을 누비며 공적을 쌓은 그의 일생에서 빛을 발하는 부분은 단연 "합비전투"

 

  손권10만 대군을 단 800기마로로 무참히 발라주시며 강동에 "遼來來!(장료가 온다!)"라는 고사를 남겨주셨다.

  -물론 현대 중국젊은이들은 이 속담이 뭔지 모른다. 역시 삼국지는 본토보다 한국에서 인기가 좋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후 일종의 과대집착증이 있었던 손권은 그날의 복수를 위해, 전략 요충지 공략을 위해 합비를 연거푸 공략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손권이 장료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아래 나오는 정사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이 있었던 위나라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탕으로 진수가 기록한 것이니 이는 믿을 수 있는 사실임에 다시 한번 장료의 위세에 전율하게 된다.

 

  자신의 황제(위문제 조비)와, 적의 왕(오대제 손권)과 관공에게 즉, 세나라의 영웅들에게 인정과 감탄을 자아낸 사나이. 진정으로 "삼국무쌍"의 이름이 걸맞은 무장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인 면은 기록이 전무하여 사마의나 하후돈 같은 올라운드 플레이어라 말 할수는 없지만, 두가지 길을 가지않고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살림으로써, "싸나이 가는길"을 그대로 달려가면서 전설로 남은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장료야 말로 위국의 4번타자, 불세출의 원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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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오늘 점심은 뭘로 먹지..

드라마 삼국지의 장료.

눈썹에서 강한 아우라가..

 

장료전(張遼傳)

  장료의 자는 문원(文遠)이고, 안문군(雁門郡) 마읍현(馬邑縣) 사람이다. 본래 섭일(攝壹)의 후손으로, 원수를 피하여 바꾸었다. 젊었을 때 군리(郡吏)가 되었다.
-> 오! 원래는 섭료였군요. 그대로 살았어도 꽤 임팩트있는 이름인듯.


  한말(漢末=여기서는 後漢), 병주자사(幷洲刺史) 정원(丁原)은 장료의 무력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해서 그를 불러 종사(從事)로 삼아고, 병사를 지휘해 경도(京都=수도)로 가게 했다.

->정원한테 인정받았을때 대충 나이를 계산해도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일텐데..


  하진(何進)이 (그를) 하북(河北)으로 보내 군병을 모집케 했는데 1천여인을 얻었다. 귀환한 후, 하진이 패망하자(십상시 같은 환관들에게 살해당한 사건) 병사를 데리고 동탁(董卓)에게 속했다.
동탁이 패망하니 병사를 데리고 여포(呂布)에게 속했고, 기도위(驥都尉)로 승진했다. 여포가 이각(李 )에게 패배하니, 여포를 따라 동쪽 서주(徐州)달아나, 노국[魯國; 여기서 노국은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예주(豫州)에 포함된 6개 군국인 영천(潁川) 여남(汝南) 양국(梁國) 패국(沛國) 진국(陳國) 노국(魯國)중 한 군국(郡國)을 말합니다. 주(州) 휘하의 하나의 지방 행정단위로서 국(國)일 경우 그 국(國)의 최고 행정관 직책이 상(相)입니다.) 상(相) 직을 맡았는데, 이때 나이 28세였다. 
  태조(太祖=위 태무제 조조)가 하비(下 )에서 여포를 무찌르자 장료는 그 병사를 데리고 항복하니, (그를) 중랑장(中郞將)에 배수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내렸다. 수차례 전공을 세워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했다.
->자사 정원, 그리고 하진, 다시 동탁, 여포 이제는 조조로 이어지는 그의 행적으로 보건데, 그의 취업관(?)은 충성심보다는 군세와  강한 무(武)를 지니는 패도에 의한 출세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하긴, 내가 장료의 인적성 검사를 해본것도 아니고..

  원소가 격파되자, 따로 장료를 파견해 노국의 여러 현을 평정하게 했다. 하후연(夏侯淵)과 같이 동해(東海)에서 창희(昌 )를 포위하는데, 수개월이 지나 군량이 다하여 군대를 이끌고 환군할 것을 의논했는데, 장료가 하후연에게 말하길 며칠 이내로 매양 여러 포위처를 순행하면, 창희는 번번이 나를 보게 될 것이오. 또 (그들이) 쏘는 화살이 재차 적어지면, 이는 필히 창흐가 계획을 머뭇거린 것이니, 그래서 힘써 싸우지 않고 있소. 내가 그와 같이 얘기보고자 하는데, 그러면 그에게 (항복을) 권유해볼 만 하지 않겠소?라 했다. 이에 사신을 보내 창희에게 말하길 공이 명을 내려 내가 이를 전하게 되었소라 했다. 창희가 과연 내려와 장료와 더불어 얘기하는데, 장요가 조공[원문은 태조라 되어 있는데, 이는 후대의 추증이고 당시에도 그렇게 불렀을 턱이 없으니, 이하 나오는 태조는 모두 그냥 조공(曹公)이라 하겠습니다] 신성한 무위가 있고 마침 그 덕이 사방을 덮고 있어서, 먼저 귀부한 자는 큰 상을 받을 것이오라 했다. 창희가 이에 항복을 허락했다. 장료는 마침내 단신으로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창희의 집에 들어가 그 처자에게 절하였다. 창희는 기뻐하며 그를 따라 조공에게 갔다.

-> 항장(항복한 장수)에게 그 조조가 여러현을 평정케 했다는 점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이미 일정한 수준을 넘어섰음을 알게 해준다. 또한 창희의 예로 보건데, 그는 전장에서의 경험에서 얻은 상대의 심리변화를 이용할줄 아는 지혜가 있다. 이는 손자가 추구하는 최고의 병법,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에 부합하는 행동이다. 역시 장료는 결사 전쟁을 부르짖는 장수와는 다르다.

 

 조공은 창희를 돌아가도록 하고, 장료를 꾸짖어 말하길 이는 대장부의 법도가 아니오라 했다. 장료의 사과하며 말하길 명공(明公)의 위신이 사해에 자자하고 저는 성지(聖旨)를 받을어 행한 것이기에 창희가 필시 감히 (저를) 해치지 못한 까닭입니다라 했다.

  여양(黎陽)에서 원담(袁譚)과 원상(袁尙)을 토벌하는데 종군해, 공을 세워 중견장군(中堅將軍)의 직을 행하게 되었다. 업( )에서 원상을 공격하는데 따라갔으나, 원상이 견고하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조공이 허도로 돌아와 장료와 악진(樂進)에게 음안(陰安)을 점령하고 그 백성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했다. 

  다시 업을 공격하는데 따라갔는데 업이 격파되자, 장료는 따로 조국(趙國)과 상산(常山)을 둘러보면서 연산(緣山)의 여러 도적과 흑산적(黑山賊) 손경(孫輕) 등을 초무(招撫)해 항복시켰다. 원담을 공격함에 따라사 원담이 격파되자, 따로 병사를 이끌고 해안가를 순행하면서 요동적(遼東賊) 유의(柳毅) 등을 격파했다. 업으로 돌아오자, 조공이 몸소 나가 장료를 맞으며, 그를 데리고 같이 수레를 탔으며, 장료를 탕구장군(蕩寇將軍)으로 삼았다.
-> 싸움에 나가면 이기고 돌아오는 장수를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이제 장료의 승진도 탄탄대로군요.


  다시 별도로 형주를 공격하게 되었는데, 강하(江夏)의 여러 현을 평정하고, 돌아와 임영(臨潁)에 주둔했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유성(柳城)에서 원상을 정벌함에 따라갔는데, 창졸간에 적들과[원문은 로(虜)입니다. 대단한 경멸의 호칭이죠] 조우하게 되니, 장료가 조공에게 싸우기를 권하는데 그 기세가 심히 분격하니, 태조가 장하게 여기어 자신이 쥐고 있던 대장기를 장료에게 주었다. 마침내 (원상을) 공격해 크게 격파하고, 선우(單于) 답돈( 頓)을 참수했다.
-> 부하가 상사에게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예우, 전권이양을 받아 흉노의 CEO 답돈을 격파합니다. 상사의 믿음에 보답하는 장료는 멋쟁이.

  이 때 형주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다시 장료는 파견해 장사(長社)에 주둔케 했다. 출발에 임해서 군중에 모반을 꾀하는 자가 있어 밤에 혼란을 일으키고 불을 놓으니, 온 군대가 다 두려워했다. 장료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길 경거망동 말라. 이것은 한 군영이 다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필시 모변을 일으킨 자가 있어 사람들을 동란(動亂)케 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에 군중에 영을 내려 반역치 않은 자는 편히 앉으라고 했다. 장료가 친히 병사 수십 명을 데리고 진영에 가운데로 가 섰다. 잠시후 모반을 꾀한 우두머리를 잡아 죽였다.
-> 진중의 소란을 일시에 제압하는 통찰력과 통솔력을 가진 중간관리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

  진란(陳蘭)과 매성(梅成)이 저( )족의 6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태조가 우금과 장패(臧覇) 등을 파견해 매성을 토벌토록 하고, 장료는 장합(張 )과 우개(牛蓋[얘가 누군지 삼국지 내에서는 전혀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우금의 잘못이 아닐까 했는데, 교감(校勘)부분에도 그런 말이 없고, 우금은 분명 매성 토벌 임무라서 다시 여기에 우금이 거론된다는 것이 이상하고.. 여튼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를 감독해 진란을 토벌하도록 했다. 진성이 거짓으로 우금에게 항복하자, 우금이 돌아갔다. 진성이 마침내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진란에게 갔다가, 돌이켜 첨산(籤山)으로 들어갔다. 그 속에는 천주산(天柱山)이 있었는데, 높이가 20여리요 길이 험하고 좁아, 샛길로 걸어가야 겨우 통과할 수 있는제, 진란 등은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장료가 진격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병사는 적고 김은 험하니, 깊이 들어가는 방법은 쓰기 어렵습니다라 하니, 장료가 이것이 소위 일여일(一與一; 일대일 정도의 의미같은데.. 잘은 몰라요)이란 것이니, 용맹한 자만이 나아갈 수 있을 뿐이오라 했다. 마침내 산아래 군영으로 진격해 도달하여 공격해, 진란매성의 목을 베고, 그 나머지들은 모두 포로로 하였다. 조공이 여러 장수들의 공을 논하며 말하길 천산에 올라 헌준한 산고비를 밟아, 진란과 매성을 취한 것은 탕구장군의 공이다라 했다. 봉읍을 더해주고 부절을 내려주었다.
-> 참.. 뭔 일있으면 출장을 나가는 장료. 더군다나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멘트를 날림으로써 조직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그로써 성공을 거둬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위국의 부장에서 임원진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쳤습니다.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고 돌아와, 장료와 악진(樂進), 이전(李典) 등에게 7천여명을 이끌고 합비(合肥)에 주둔토록 했다. 조공이 장로(張魯)를 정벌하는데, 호군(護軍)인 설제(薛悌)에게 명령문(敎)을 주며, 봉함 겉에는 적이 이르거든 펴보라고 했다. 얼마 안돼 손군이 10만명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하니, 이에 같이 명령문을 펴 보았는데, 명령문에 이르길 만약 손권이 오게 되면, 장료와 이전 장군은 출전하고, 악진 장군은 수비하면 군대를 감호하며 그들과 교전하지 마라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의아해 했다.

  장료가 말하길 조공이 원정을 나가 멀리 있으니 구원병이 이르길 의지하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격파하게 될 것이오. 이것은 채 합쳐지기 전에 역습하여 그 성세를 꺾고 성안의 마음을 안심시키고 난후에 가히 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거요. (이 전투의) 성패의 기미가 이 일전에 달려있는데, 그대들은 뭘 의심하시오?라 했다. 이전 또한 장료와 (생각을) 같이했다.
-> 사실 이전은 조조가 거병했을때부터 따라다닌 개국공신격의 인물인데 낙하산인 장료의 밑에 있으니 배알꼴리겠죠. 장료도 이런 사내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그는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대신 대의와 조직의 성공을 위해 사심을 버리고 상대를 설득하는 동시에 조직의 방침을 엄격히 이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제 그의 행동이 옳았음이 증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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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인, 킹콘타 원작의 창천항로, 합비전투편.

노장이 된 장료가 쌓아온 무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간의 것이 아닌 귀신의 무예를 펼치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소름이 쫘~악!

이후 어느 싸움에서도 "장료가 온다!"라는 말만 들려도 상대편 군사들의 사기가 급 저하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에 장료가 밤에 감히 따라 나설 병사를 모집하여 8백명을 얻어, 소를 잡아 장사들을 먹이고, 다음날 큰 전투를 준비했다. 아침무렵 장료가 갑옷을 입고 창을 쥐고 먼저 적진에 올라가 수십명을 죽이고 장수 둘을 베고선 크게 제 이름을 부르고, 보루를 치고 들어가 손권의 대장기 아래까지 이르렀다. 손건이 크게 놀랐으나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산위로 달아나 올라가니, (장료는) 긴창으로 스스로를 지켰다. 장료는 손권이 싸우지 않음을 꾸짖었으나, 손권은 감히 움직이지 않고, 멀리고 장료가 이끄는 병사들이 적음을 보고, 이에 병사를 불러 장료를 여러겹으로 포위하게 했다. 장료의 좌우에서 포위망을 지휘해 곧장 앞쪽으로 급히 치자, 포위망이 열려서장료 이끄는 후하의 수십인은 나올 수 있었으나, 나머지 병사들을 소치리길 장군, 우리를 버리십니까!라 했다. 장료가 다시 포위망에 돌진해 들어가 나머지는 데리고 나왔다. 손권 부대의 인마(人馬)들은 다 쓰러져서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싸웠는데, 오나라 사람들은 기세를 읽고, 돌아와 수비를 보완했다. 성안 사람들의 마음은 다 안정되었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종했다. 손권은 합비를 10여일간 공격했으나, 성이 함락되지 않으므로, 이에 군사를 이끌고 퇴각했다. 장요가 여러 장군들을 이끌고 추격하여, 거의 다시 손권을 잡을 뻔 하였다. 태조가 장료를 크게 장하게 여겨, 정동장군(征東將軍)에 배수했다.

->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인가? 더군다나 50이 넘은 나이에? 성에 남은 인원은 2800명, 상대는 10만. 모두가 수세를 생각할때 오히려 공세로 전환한 그의 역발상 전략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감녕의100기 결사돌격대에 의해 연의에서 희미하게 사라져버린 이 장면, 촉한정통론을 위해 위나라의 공적을 줄여야만 했던 나관중도 분명 이 대목에서는 작가로서의 고민이 상당했음은 분명했을 것이다.


  건안 21년(216), 조공이 다시 손권을 정벌하러 합비에 이르러, 장료가 싸우던 장소를 순행하면서 오래동안 탄식(이라기 보다는 감탄이 옳지 않나? 나같아도 기쁘고 놀라움에 말을 못했겠다.)했다. 이에 장료의 병사를 늘려주고, 여러 군사를 많이 남겨두면서 거소(居巢)로 옮겨 주둔시켰다.

  관우가 번(樊)에서 조인을 조위할 때, 마침 손권이 (위의) 번신(藩臣)이라 칭하니, 장료 및 여러 장군들을 물러 모두 돌아가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장료가 채 이르지 않았는데, 서황이 이미 관우를 격파하여, 조인에 대한 포위가 풀렸다. 장료와 조공이 마피(摩陂)에서 만났다. 장료의 군대가 이르자, 조공이 수레를 타고 나와서 그들을 영접했고, 돌아가서 진군(陳郡)에 주둔했다. 문제(文帝=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전장군(前將軍)으로 승진했다. 형인 장범(張汎) 및 아들 하나를 열후에 나눠 봉했다.

-> 전장군이 됨으로써 장료는 임직원의 자리에 오릅니다. 더불어 집안까지 제후에 봉해졌으니 이보다 나은 결과가 있을까? 가설이지만 만약 장료가 관우와 마주쳐 싸워 그를 격파했다면 장료도 연의에서 좋게 나오기는 힘들었을듯.

  손권이 다시 모반하자, 장료를 보내 합비에 주둔케 하며, 장료의 작위를 도향후(都鄕侯)로 올려주었다. 장료의 모친에게 수레를 주고, 아울러 병마를 보내 장료의 식구들을 (그의) 주둔지로 보내고, 장료의 모친이 도착하며, 행렬에 따르는 종자(導從)들이 나와 영접하라고 칙서를 내렸다. (장료가) 감독하는 여러 군대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길가에 벌려 서서 절하니, 그 광경을 보던 자들이 이것을 영화롭게 여겼다.
->그의 출근지는 이제 합비로 고정됐습니다. 어머니가 빛을 보려면 사내가 성공해야 한다던데 그말이 맞군요. 저도 어서 성공을 해야 어머니가 호강하실텐데..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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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합비에선 합비의 영웅인 장료를 잊지 못하나봅니다. 중국합비에 있는 장료상입니다.

이 사진을 중국사이트에서 발췌했는데 저 빨간망토가 공산당에 대한 저항이었던가..

여하튼 안좋은 의미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워낙 대충읽어서리..

제가 공부하던곳에서 가까웠는데 합비성은 이미 없다는 말에 좌절.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진양후(晉陽侯)에 봉하고, 식읍 1천호를 늘려주어 앞서의 식읍과 합쳐 모두 2천6백호가 되었다. 황초(黃初) 2년(221) 장료가 낙양의 궁전에 조알(朝謁)하자, 문제가 장료를 인견(引見)해 건시전(建始殿)에서 회동하며, 친히 오를 격파했을 때 상황을 물었다. 황제가 탄식하며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길 이자는 또한 옛 소호(召虎 ; 주 선왕때 용맹한 장수)로다라 했다. (그를 위해) 큰 집을 짓는데, 또 특별히 장료의 모친을 위해 전(殿)을 지으라고 하고, 장료가 오군을 격파할 때 응모한 보졸(步卒)들은 모두 호분(虎賁)으로 임명했다. 
  손권이 다시 번신이라 칭했다. 장료가 돌아와 옹구(雍丘)에 주둔하다 병에 걸렸다. 황제가 시중(侍中) 유엽(劉曄)에게 태의(太醫)를 데리고 가 그의 병세를 살피게 했다. 호분들이 그 소식을 묻느라 길가에 서로 쭉 이어져 있었다. 병이 낫지 않으므로 황제가 장료를 맞이하느라 행재소로 가서, 거가(車駕)에 친히 타고 가서, 그의 손을 잡고 어의를 하사하며, 태관에게 날마다 황제의 음식을 죽었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돌아와 주둔했다. 손권이 다시 모반하니, 황제가 장료를 파견해 배를 타고 조휴(曹休)와 함께 해릉(海陵)에 이르러 장강에 임했다. 손권이 매우 두려워 하며 여러 장수들에 칙명을 내려 말하길 장료가 비록 병에 걸렸다 하나, 당해낼 수 없으니, 분하도다! 이 해에 장료와 여러 장수들이 손건의 장수 여범(呂範)를 격파하였다.

->조비는 장료를 인간적으로도 끔찍하게 좋아했나 봅니다. 직접 싸움을 본적은 없어도 장료의 행적만으로도 감탄을 할정도니까요. 2대에 걸쳐 사랑을 받는것도 일종의 복이죠. 물론 능력이 수반된 복.


  장료의 병이 위독해져 마침내 강도(江都)에서 죽었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며 시호를 '강후(剛侯)라고 했다. 아들 장호(張虎)가 뒤를 이었다.
->연의에서 황충은 극적으로 죽게 포장을해놓고 장료는 독자에게 통쾌함을 전해주며 화살에 이마를 맞아 전사합니다. 그것도 오나라 정봉이 쏜화살에 맞아서요. 

  연의의 이야기와는 다르지요? 전장에서 죽는것이 장수된 복이라 하지만, 그 많은 수라의 장을 거쳐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가 집에서 죽는것이 더 나은 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로 화살을 맞고 죽었다던 황충도 집에서 노환으로 죽었답니다.-_-; 근데 시후가 강후야... 얼마나 강했으면...


  황초 6년, 문제가 장료와 이전이 합비에서 공이 있음을 추념해 조서를 내려 이르길 합비의 전역(戰役)에서 장료와 이전은 보졸 800명을 적 10만을 격파했으니, 옛부터 용병(用兵)에 이런 적이 없었다. 적들이 이제 기세를 잃게 하였으니, 가히 나라의 조아(爪牙 ; 충신)라 할만 하다. 장료와 이전의 식읍 각 1백호씩을 나눠 한 아들에게 관내후의 작을 하사하라고 했다. 장호는 편장군(偏將軍)이 되었다가 죽었다. 그의 아들 장통(張統)이 후사를 이었다.

-> 아버지만한 자식없는건가요? 장호는 편장군에서 직위를 멈추게 됩니다. 용맹의 부족일 수도, 군사적 재능의 부재일수도, 혹은 거의 종장을 맞아가는 안정의 시대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여하튼, 장료는 인간의 것이 아닌 귀신 같은 무용을 지녔던 장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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