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이벤트]삼국지 정사 조인전

건모2 작성일 09.11.05 12: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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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 '패전의 장수'로 기억되는 장수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다른 고민없이 말할 것이다.

 

'하후돈, 조인, 장합.'

 

  그중 하후돈은 관우랑 좀 비슷해 보이는 지위와 무공이 있고, 장합은 원소군의 안량, 문추 다음가는 군사적 재능(물론 게임덕이 무척 크다고 본다)이 있다는걸 많은 분들이 인지하고 있으시지만, 정말 복도 없으신 이분은..

  

삼국시대 최고의 명가 조씨라는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임펙트가 조휴급이며

 

진짜 주구장창 깨지고 산발로 시근벌떡 조조앞에 뛰어와서 '형님, 저 죽여주세요!'를 입에 달고 다니는 브라더 보이.

 

나도 정사와 창천항로를 읽기 전에는 조인은 배경덕에 출세한 장수....

 

...라 생각했지만,

 

자, 이제 정사를 한번 보자. 이 조인이라는 장수는,

 

위군의 장수중에 가장 많은 전쟁을 치뤘으며,

 

가장많은 전공을 세웠고. 관공도 듣지못했던 "천인天人'이란 칭호까지 받은 지용겸비한 조조군의 에이스였던 것이다.

 

각지의 반란군은 물론이거니와, 실제로 그가 대적했던 상대는 당대 최고의 장수인 주유와 관우였다.

 

특히나 '그 대단한'주유와의 전쟁은 결국 성은 잃었지만 별다른 보급없이 1년을 버텨내며 적벽의 승기를 탄 동오의 북벌기세를 꺽어놓았으며.

 

관우와의 싸움에서는 관공의 대공세를 성하나에 의지하며 버텨내 결국 관우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계기를 촉발시키게 했다.

 

조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아래의 정사를 보라!

 

한번보면 매일 산발로 "형님~!"하며 헐래벌떡 허도로 향하던 그의

 

모습은 머리속에서 싹~ 지워질 것이라 확신한다.

 

철벽의 조자효, 진심 삼국시대의 후덜덜이다..

 

 

 

삼국지 위서 조인(曹仁)전
 
  조인의 자는 자효(子孝)이며, 태조(조조)의 사촌동생이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주살( ) 사냥을 좋아했다. 나중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났을 때, 조인 또한 몰래 젊은이들과 결의하여 천여 명을 얻어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태조를 따라 별부사마(別部司馬)가 되었고 여봉교위( 鋒校尉)를 맡았다.
 
  태조가 원소를 격파했는데, 조인이 참수하고 획득한 것이 자못 많았다.
 
  서주를 정벌하는데 종군하였는데, 조인은 항상 기병을 독려하여 군의 선봉이 되었다. 따로 도겸(陶謙)의 장수 여유(呂由)를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고, 돌아와 대군과 팽성(彭城)에서 합류하여 도겸 군을 대파했다. 비(費)·화(華)·즉묵(卽墨)·개양(開陽)을 공략하는데 따라갔다. 도겸이 별장(別將)을 보내 여러 현을 구원하게 했는데, 조인이 기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태조가 여포를 정벌함에 조인은 따로 구양(句陽)을 공격하고 이를 함락시키며, 여포의 장수 유하(劉何)를 생포했다.
  태조가 황건적을 평정하고 천자를 맞아 허(許)현에 도읍을 정했는데, 조인이 수차례 공적이 있다 하여 광양(廣陽)태수로 배수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기와 지략을 중히 여겨 광양군으로 보내지 않고, 의랑(議郞)(벼슬 자격)으로 기병을 감독하게 했다.
 
  태조가 장수를 정벌하는데, 조인은 따로 주변 현을 돌아다니며, 남녀 3천여명을 사로잡았다. 태조가 군대를 되돌렸는데, 장수에게 추격당하여 군세가 불리하고 병사들은 사기를 잃었지만,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에 앞장서 격려하며 매우 분투하니, 태조가 그를 장하게 여겼고, 마침내 장수를 격파했다. 
 
  태조가 관도(官渡)에서 원소와 오랫동안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원소를 유비를 보내 강한 여러 현을 돌아다니며 공략케 하니, 많은 곳에 일어나 이에 호응하였다. 허도 이남의 관리와 백성들이 불안해 했고, 태조가 이를 걱정하였다. 조인이 말하길 남쪽은 대군이 바야흐로 목전에 닥친 위급함이 있어 그 세력상 능히 서로 구원해 줄 수 없고, 유비가 강병으로 임하고 있어서, (여러 현들의) 그 배반함은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유비가 새롭게 원소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지만, 그들을 충분히 사용할 수 없으니, 그를 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 했다. 태조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기병을 거느리고 유비를 치게 하여 그를 격파하여 패주시키고, 조인은 다시 여러 배반하였던 현을 모두 다 거두어 돌아왔다.
  원소가 별장 한순(韓荀)을 보내 서쪽 길을 초략하고 끊게 하였는데, 조인이 계락산( 洛山)에서 한순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 때문에 원소는 감히 다시는 병사를 나눠 출동시키지 못했다. 다시 사환(史渙) 등과 함께 원소군의 운반수레를 초략(抄略)하고 그 곡량을 불태웠다.
 
  하북이 평정되고 난 후, 호관(壺關)현을 포위하는데 따라갔다. 태조가 영을 내리길 성이 함락되면, 모두 다 파묻어 죽여라고 했다. 달을 이어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조인이 태조에게 말하길 성을 포위함에 반드시 살아날 문(活門)을 보여주는 것은, 그들에게 살아나갈 길(生路)을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지금 공께서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하니, 저 사람들이 직접 장차 지키려고 합니다. 또한 성은 견고하고 식량은 많으니, 공략하면 군사들만 다치고 수비하면 시일만 오래 끌게 됩니다. 지금 견고한 성 아래서 병사들을 머물러 두고, 공격하여 반드시 저들을 죽이겠다고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 했다. 태조가 이 말을 따르니, 성이 항복했다. 이에 조인의 앞뒤의 공을 기록해 도정후(都亭侯)에 봉했다.
 
  형주를 정벌하는데 따라갔는데, 조인에게 정남장군(征南將軍)의 직을 맡겨 강릉(江陵)에 남겨 주둔하여, 오의 장수 주유(周瑜)에 항거케 하였다. 주유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하러 왔는데 선봉의 군사 천여 명이 막 이르르자, 조인이 성위에 올라가 이를 보고서, 이에 3백명을 모집하고, 부곡(部曲; 사적 예속인, 부하)인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도리어 적에게 도전하게 했다. 적들이 많았지만, 우금의 군사는 적어 마침내 포위되었다. 장사(長史) 진교(陳矯)가 함께 성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락되려 하자, 좌우에서는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의 의기(意氣)가 매우 분격하여, 좌우에게 말을 가져 오라 하고, 진교 등에게 함께 (우금을) 구원하라 하였다. (진교가) 조인에게 말하길 적이 강성하여, 당해낼 수 없습니다. 가령 저들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무슨 고통이겠습니까만 장군께서 몸소 가신다니오!라 했다.
  조인이 이에 응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휘하의 장사(將士)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갔다. 적들 앞 1백여 보 앞에서 도랑에 근접하였는데,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도랑 가에 머물고 우금을 위한 형세를 마련할꺼라 여겼는데, 조인은 가볍게 도랑을 건너 곧장 전진하여 적의 포위망으로 충돌해 들어가니, 우금 등이 이에 해치고 나왔다. 나머지 군사들이 아직 다 빠져 나오지 못하자, 조인은 다시 곧장 되돌아 돌격하여 우금을 병사를 탈출시키고, 여러 명을 죽이니, 적군이 이에 퇴각하였다. 진교 등은 처음 우금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지만, 조인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이에 감탄하며 말하길 장군은 참으로 하늘이 내려주신 사람(天人)입니다라 했다. 삼군(三軍)이 그 용기에 감복하였다. 태조는 더욱 그를 장하다고 여기고, 그를 옮겨 안평정후(安平亭侯)에 봉했다.
 
 
  태조가 마초(馬超)를 정벌할 때,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 직을 맡겨 여러 장수들을 감독해 동관(潼關)을 막게 하고 위수(渭水) 남쪽에서 마초를 격파했다. 소백(蘇伯)과 전은(田銀)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칠군(七軍)을 총괄하여 전은 등을 토벌케 하여 이를 격파했다. 다시 조인에게 정남장군 직을 임시로 맡기고 부절을 내려주어, 번(樊)성에 주둔하며 형주를 진수(鎭守)토록 했다.
 
  후음(侯音)이 완(宛)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위 현에서 병사 수천 명을 얻으니, 조인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후음을 공파하여 그 목을 베고, 돌아와 번성에 주둔하였고, 곧 정남장군에 배수되었다. 

   관우(關羽)가 번성을 공략하자, 이때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于禁) 등 칠군이 모두 물에 빠져 죽고, 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다. 조인은 인마(人馬) 수천으로 성을 지켰는데, 성이 물에 잠기지 않기 위해 여러 겹의 판(板)을 대었다. 관우가 배를 타고 성에 임박하여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안팎으로 단절되고 양식은 거의 다 하였는데,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조인은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여 필사의 각오를 보이자, 장수와 병사들도 감격하여 모두 두 마음이 없었다. 서황이 구원하러 오고 물도 점차 빠지니, 서황은 밖에서 관우를 치고, 조인은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나가자, 관우는 퇴각하여 달아났다.
 
  조인은 어릴 때 행실이 검약하게 수행하지 않았는데, 장성하여 장군이 되자, 엄정하고 법령을 받들어 항상 주변에 법조문을 두고 살펴보며 일을 처리했다.  언릉후( 陵侯) 창(彰)이 북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할 때, 문제는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편지를 써서 조창을 경계하길 장수가 되어 법령을 받드는 것은 마땅히 정남장군(=조인)과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라 했다. 왕위에 오르자 조인을 거기장군(車騎將軍), 도독형·양·익주제군사로 배수하고, 봉작을 올려 진후(陳侯)에 봉하고, 봉읍 2천호를 늘려 이전 것과 합쳐 3천 5백호가 되게 하였다. 조인의 부친 조치(曹熾)에게 시호를 추증하여 내려 진목후(陳穆侯)라 하고, 수묘(守廟) 10가(家)를 두었다. 후에 불러들여 돌아와 완성에 주둔하게 했다.
 
  손권이 장수 진소(陳邵)를 보내 양양(襄陽)을 점거하게 했는데, 조인에게 조칙을 내려 이를 토벌하게 했다. 조인은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마침내 양양으로 들어가, 장군 고천(高遷)등을 시켜 한수 이남으로 귀부한 백성들을 한수 이북으로 옮기니, 문제가 사신을 보내 조인을 대장군(大將軍)에 배수했다. 또 조인에서 조칙을 내려 둔영을 임영(臨潁)으로 옮기고 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승진시키고, 다시 여러 군대를 감독해 오강(烏江)을 점거케 하고, 돌아와 합비(合肥)에 주둔하게 했다.

  황초(黃初) 4년(223) 죽으니, 시호를 충후(忠侯)라 하였다.[주 :『위서』에 이르길 이 때 조인의 나이 56세였다라 했다. 『부자(傅子)』에 이르길 조대사마의 용맹함은 맹분과 하육도 더하지 못한다. 장료(張遼)는 그의 다음간다라 했다.]

  아틀 조태(曹泰)가 뒤를 이어, 관직이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이르르니 부절을 내려주었고, 옮겨서 영릉후( 陵侯)에 봉했다. 조태가 죽으니, 아들 조초(曹初)가 뒤를 이었다. 또 조태의 아우인 조해(曹楷)와 조범(曹範)을 분봉하니, 모두 열후(列侯)가 되었고, 우금(牛金)의 관직은 *군(侯將軍)에 이르렀다.
 
[조인의 열전 뒤에 조인의 아우 조순(曹純)의 열전이 부기(附記)되어 있습니다]

조인의 동생은 조순(曹純)인데,[ 주 : 『영웅기(英雄記)』에 이르길 조순의 자는 자화(子和)이다. 나이 14살 때 부친을 잃었는데, 동산(同産;어머니가 같은 형제) 형인 조인과는 따로 살았다. 아버지의 업을 계승하여 재산에서 부유해져서, 하인이나 노복, 빈객이 수백이나 되었지만, 조순은 기강을 잘 제어해 그 도리를 잃지 않으니, 향리(鄕里)에서는 모두 그가 유능하다고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학사(學士)들을 공경하고 아끼니, 학사들이 많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로 인해서 멀고 가까운 곳에서 칭송을 받았다. 나이 18세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20세에 태조를 따라 양읍(襄邑)에 도착해서 병사를 모집하였고, 끝내 항상 정벌마다 따라 다녔다.라 했다]

 

  처음 의랑(議郞) 참사공군사(參司空軍事)로써, 호표기[虎豹騎; 단위 부대의 명칭은 확실한데, 다른 전거가 없어 정확한 임무는 모르겠습니다. 『조휴(曹休)전』에 조휴가 호표기를 통솔해 숙위했다는 기사, 『조진(曹眞)전』에 조진이 호표기를 이끌고 적들을 토벌했는 기사 정도가 있어서, 숙위나 친종(親從)등의 임무를 맡은 별도의 정예기병부대 정도로 이해하는게 맡는 것 같습니다. 몰론 확실한 거는 모릅니다.]를 감독해 종군하여 남피(南皮)를 포위했다. 태조가 (포위를) 늦추려 했지만, 조순이 말하길 지금 천리나 가서 적들을 대하는데, 진격해도 능히 이길 수 없고 물러나면 필히 위엄을 잃게 됩니다. 또 현의 군사들이 깊이 들어가 지구전을 펼치기도 어렵습니다. 저들은 승리하여 교만하고, 우리는 패배하여 두려워하지만, 두려움으로 교만함을 대적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라 했다.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급박히 공격하니, 원담이 패배했다. 조순은 휘하의 기병을 거느리고 원담의 목을 베었다.
 
북으로 3군(郡)을 정벌하는데, 조순에 속한 기병이 선우(單于) 답돈( 頓)을 포획했다. 전후의 공으로 고릉정후(高陵亭侯)에 봉해지고, 식읍 3백호를 받았다.
 
 형주를 정벌하는데 따라가, 유비를 장판에서 추격하여, 그의 두 딸과 군수품을 얻고, 그의 흩어진 군사들을 거둬들였다. 진군하여 강릉을 항복시키고, 거기서 초( )현으로 돌아왔다.
건안(建安) 15년(210)에 죽었다. 문제가 즉위하자,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하였다.[ 주 : 『위서』에 이르길 조순이 감독한 호표기는 모두 천하의 용맹한 정예로 혹 백명의 장수들 중에서 (감독자를) 보임했는데, 태조가 그 장수를 뽑기가 어려웠다. 조순이 선택되어 감독자가 되자 (그들을) 심히 위무하여 인심을 얻었다. 그게 죽게 되자, 담당관리가 대신할 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아뢰니, 태조가 조순 같은 무리를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나 혼자도 감독하기에 적당치 않은가? 라 하고 끝내 선택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조연(曹演)이 뒤를 이었는데, 관직은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이르렀고, 정원(正元; 254~255년) 연간에 봉작이 올라 낙향후(樂鄕侯)에 봉해졌다. 조연이 죽자 아들 조량(曹亮)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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